1991 인촌상 수상자
산업기술
김선홍
전 기아그룹회장
1958년 당시 기아산업㈜에 공채1기로 입사하여 30여년만에 그룹 회장직에 올라 우리나라 전문경영 체제에 준거를 제시한 기업인으로 기아그룹을 국내 유수의 기업그룹으로 끌어올렸다.
사장으로 취임한 1981년 기아산업의 상황은 79년 제2차 석유파동에 이은 중화학분야 투자 조정조치와 80년 자동차산업 합리화 조치로 누적적자가 무려 5백억원에 이르는 도산 직전이었다. 그는 <새로운 경영, 새로운 기술, 새로운 일터>의 경영이론을 피력하고 RCD22운동(Reasonable Cost Down-22만원)을 전개하는 한편 봉고차 판매운동을 전 기아가족 차원에서 실시했다.
과감한 기술개발과 기술혁신으로 봉고를 다양화, 우리나라 자동차문화에 새장을 열면서 기업사에 길이 남을 기아 회생의 드라마를 연출하였고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혁신적 원가절감운동인 RCD22운동을 추진하여 차량 가격을 대당22만원씩 절감함으로써 국내자동차업계에 자극제 역할을 했다. 또한 농촌의 실정에 맞는 다목적 트럭 세레스를 개발하는 한편 자동차 수출시장에 뛰어드는 모험을 선택, <기아신화>를 창조하는데 기초가 되었다.
그는 또 21세기에 대비한 설비투자와 기술개발 및 인재양성에 힘을 쏟아 자동차 종합기술연구소 설립, 프라이드 개발, 기술 및 경영관리의 효율화를 위한 수퍼 컴퓨터 설치, 대체에너지 이용과 환경보전을 위한 메탄올 자동차 개발 등 기술의 기아를 지향하였다.
그는 기업이익의 사회환원, 나아가 후진들의 양성에 큰 관심을 갖고 육영문화사업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다. 창업주의 유지를 받들기 위한 학산기술장학재단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으며 창녕공고와 고암중학의 이사장으로 재직하면서 이들 학교를 후원하고 있다. 또한 서울 오페라단의 이사장으로서 문화사업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는 등 기업의 이익이 공익적 차원에서 쓰여질 때 가장 값지다는 그의 경영철학을 몸소 실천하였다.
사장으로 취임한 1981년 기아산업의 상황은 79년 제2차 석유파동에 이은 중화학분야 투자 조정조치와 80년 자동차산업 합리화 조치로 누적적자가 무려 5백억원에 이르는 도산 직전이었다. 그는 <새로운 경영, 새로운 기술, 새로운 일터>의 경영이론을 피력하고 RCD22운동(Reasonable Cost Down-22만원)을 전개하는 한편 봉고차 판매운동을 전 기아가족 차원에서 실시했다.
과감한 기술개발과 기술혁신으로 봉고를 다양화, 우리나라 자동차문화에 새장을 열면서 기업사에 길이 남을 기아 회생의 드라마를 연출하였고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혁신적 원가절감운동인 RCD22운동을 추진하여 차량 가격을 대당22만원씩 절감함으로써 국내자동차업계에 자극제 역할을 했다. 또한 농촌의 실정에 맞는 다목적 트럭 세레스를 개발하는 한편 자동차 수출시장에 뛰어드는 모험을 선택, <기아신화>를 창조하는데 기초가 되었다.
그는 또 21세기에 대비한 설비투자와 기술개발 및 인재양성에 힘을 쏟아 자동차 종합기술연구소 설립, 프라이드 개발, 기술 및 경영관리의 효율화를 위한 수퍼 컴퓨터 설치, 대체에너지 이용과 환경보전을 위한 메탄올 자동차 개발 등 기술의 기아를 지향하였다.
그는 기업이익의 사회환원, 나아가 후진들의 양성에 큰 관심을 갖고 육영문화사업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다. 창업주의 유지를 받들기 위한 학산기술장학재단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으며 창녕공고와 고암중학의 이사장으로 재직하면서 이들 학교를 후원하고 있다. 또한 서울 오페라단의 이사장으로서 문화사업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는 등 기업의 이익이 공익적 차원에서 쓰여질 때 가장 값지다는 그의 경영철학을 몸소 실천하였다.
학력 및 경력 |
1932년 9월 25일생 1955년 서울대학교 기계공학과 졸업 1958년 기아산업 입사 1969년 기아산업 이사 1978년 기아기공 사장 1981년 기아산업 사장 1985년 한국자동차공업협회 회장 1990년 기아그룹 회장 2003년 평화자동차 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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