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9회

2015 인촌상 수상자

김학주
인문사회 공적보기|수상소감보기 김학주 서울대 명예교수 “제가 중문학 공부를 시작했을 때는 이 분야를 이해하는 사람도, 관련 논문도 거의 없었지만 이 제는 인문 분야에서 학생들이 몰리는 학과의 하 나로 성장했습니다. 개인이 아니라 성장한 중문 학계 전체가 받는 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달 28일 경기 성남시 수내로 자택에서 만 난 김학주 서울대 명예교수(81)는 과거 펴냈던 번 역서 ‘중용’의 개정판을 감수하고 있었다.

그가 중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고교 시절 학도병으로 참전한 6·25전쟁에서 포로로 잡힌 황포군관학교 출신 중공군 장교를 만나면서부터 다. ‘제대로 된 소총도 없이 꾸준히 전투를 벌이 는 중국을 우리가 제대로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서울대 중문과에 입학했다.

당시는 중문학 교수진도 적었고, 그나마 일부 가 월북하거나 납북당한 상황이었다. 김 교수는 1959년 국비 유학생으로 대만으로 유학해 중국 국민당과 함께 대만으로 건너온 베이징대 교수들 에게서 배우며 관련 자료를 모았다. 귀국해 처음 쓴 중국의 탈놀이에 관한 논문이 일본과 대만 등 지에서 번역돼 현지 학술지에 실리기도 했다.

1961년 그는 서울대에서 중문학 강의를 시작했 지만 쓸 만한 교재가 없었다. 중문학 고전을 학생 들에게 가르치고 일반인에게 보급하기 위해 이때 부터 번역과 저술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다. 현대적 시각으로 주석을 단 당시 번역서 중 일부는 최근까지도 개정판이 나온다. 김 교수는 “그때는 한자에 토를 달아 놓은 값싼 문고본, 이른바 ‘딱지 본’이 전부여서 틀려도 나중에 고치면 된다는 생각 으로 일단 책을 썼다”며 “전국에 고전 강연을 하러 다니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다”고 회고했다.

1980년대부터는 초기의 관심으로 돌아가 중국 전 통 민간 연희 연구를 시작했다. 한중 수교 이전부터 정부 허가를 받아 중국 각지로 연희 탐사를 다녔다. 그때 수집한 중국 전통 탈 300여 점이 국립민속박물 관에 소장돼 있다. 김 교수는 “당시는 중국에 지방 연희에 관심을 가진 학자가 거의 없었고 1980년대 중반에 와서야 연구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그는 팔순이 넘은 지금도 북송 시대와 위진 남 북조시대의 문학사에 관한 책을 각각 내기 위해 준비하는 등 왕성한 연구열을 드러내고 있다. “다른 데 곁눈질하지 않고 평생 중문학만 파 왔습 니다. 이번 수상도 계속 중문학계를 위해 헌신하라 는 뜻으로 생각하는데, 늙은 저의 힘이 어디까지 닿을지 걱정입니다.”
수상자의 공적, 학력 및 경력을 나타내는 표
공적 학계에서 중문학의 입지가 협소하던 1950년대부터 연구를 시작해 중국 문학 연구의 토대를 닦은 대표적 중문학자다. 서 울대 중문학과 학사, 석사, 박사 과정과 국립대만 대 석사 과정을 마친 뒤 줄곧 서울대 교수로 재직 했다. 1967년 국내 최초로 서경(書經)을 완역한 이래 유학의 핵심 경전과 제자백가의 주요 고전 을 현대적 해석을 담아 펴냈고 동양 고전 읽기 운 동을 벌여 대중화에 기여했다. 중국의 학자들이 민간 전통 연희에 주목하기 전인 1960년대부터 탈놀이 ‘나희(儺戱)’를 비롯한 전통 가무와 잡희 에 관해 독보적인 연구 성과를 냈다. 국내외에서 현대 중문학 연구의 대표서로 꼽히는 ‘중국문학 사’를 1986년 저술하는 등 연구서와 번역서 70여 권을 냈다. 학술원 회원이다.

29회(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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