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인촌상 수상자
특별상
수상소감보기
이훈동
조선내화 명예회장
“교육과 언론문화 창달을 위해 힘써 온 인촌 선생을 평소 흠모해왔어요. 이렇게 큰 상을 받게 되니 더없이 기쁩니다.”
이훈동(90) 조선내화 명예회장은 “인촌 선생처럼 사회에 큰 족적을 남기지 못했는데 이런 상을 받을 자격이 되는지 모르겠다”며 겸손해했다.
이 명예회장은 일제강점기에 내화물(높은 온도에도 견디는 물질) 원료인 납석 광산의 직원으로 취업한 이래 평생을 한우물만 판 국내 내화물 업계의 산증인.
그는 “문어발식으로 여러 분야에 진출하다 보면 어느 것 하나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한눈팔지 않고 외길 인생을 걷다 보니 조선내화를 비롯한 계열사 모두 재무상태가 건전하다”고 말했다. ‘깨어 있는 기업만이 살아남는다’는 신념으로 그동안 남보다 앞서 현대식 설비를 들여오고 사원복지 제도를 시행해 업계의 선두자리를 지키고 있다.
배우지 못한 것을 한(恨)으로 여겼던 이 명예회장은 기업이윤의 사회 환원과 지역 인재 육성을 위해 사재를 털어 1977년 성옥문화재단을 설립했다. 77억 원의 기금으로 지금까지 학생 4000여 명에게 32억 원의 장학금을 지급했다.
이 명예회장은 “돈은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올바르게 써야 한다는 게 평소 지론”이라며 “인촌 선생처럼 남은 삶도 인재를 키우고 뒷바라지하는 데 온 힘을 쏟겠다”고 말했다. 그는 1988년 건전한 지방언론을 육성하기 위해 전남일보도 창간했다.
이훈동(90) 조선내화 명예회장은 “인촌 선생처럼 사회에 큰 족적을 남기지 못했는데 이런 상을 받을 자격이 되는지 모르겠다”며 겸손해했다.
이 명예회장은 일제강점기에 내화물(높은 온도에도 견디는 물질) 원료인 납석 광산의 직원으로 취업한 이래 평생을 한우물만 판 국내 내화물 업계의 산증인.
그는 “문어발식으로 여러 분야에 진출하다 보면 어느 것 하나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한눈팔지 않고 외길 인생을 걷다 보니 조선내화를 비롯한 계열사 모두 재무상태가 건전하다”고 말했다. ‘깨어 있는 기업만이 살아남는다’는 신념으로 그동안 남보다 앞서 현대식 설비를 들여오고 사원복지 제도를 시행해 업계의 선두자리를 지키고 있다.
배우지 못한 것을 한(恨)으로 여겼던 이 명예회장은 기업이윤의 사회 환원과 지역 인재 육성을 위해 사재를 털어 1977년 성옥문화재단을 설립했다. 77억 원의 기금으로 지금까지 학생 4000여 명에게 32억 원의 장학금을 지급했다.
이 명예회장은 “돈은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올바르게 써야 한다는 게 평소 지론”이라며 “인촌 선생처럼 남은 삶도 인재를 키우고 뒷바라지하는 데 온 힘을 쏟겠다”고 말했다. 그는 1988년 건전한 지방언론을 육성하기 위해 전남일보도 창간했다.
공적 | 연간 매출액 3000억 원의 조선내화를 비롯해 15개 기업을 거느린 전남지역의 대표적인 기업인이다. 국가 기간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은탑산업훈장, 동탑산업훈장, 국민훈장모란장을 받았다. 1964년부터 21년 동안 목포상공회의소 회장을 맡아 낙후된 지역개발을 선도했고 대한상의 부회장, 대한광업회장 등을 맡아 상공업계 발전에도 이바지했다. |
---|---|
학력 및 경력 |
1917년 10월 11일생 1938년 일본 福岡縣立農졸업 1946년 완도광산 대표 1953년 현재 조선내화 사장, 회장, 명예회장 1978년~1982년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 1986년~1989년 대한광업회 회장 2000년 전남일보 회장 2010년 별세 (10월 30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