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기와 인물평
1947년,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돌아오자 인촌 선생님은 계동댁으로 손기정.남승룡 두 선배와 나, 그리고 이철승씨등을 불러 환영 잔치를 해주셨다. 그 자리에는 형제님 그리고 자제분들 친구분들이 모여 있었는데 저녁 대접이 끝나자 선생님은 여흥을 한 번 하자 하셨다. 선생님은 따님을 부르시더니 노래를 부르라 했다. 따님은 음악 공부를 했던 것 같은데 아주 고운 소프라노로 좋은 노래를 들려 주었다.
이날 인촌 선생은,"손기정이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뛰었을 때, 우리는 우리 선수들이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뛸때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자네들은 잘 모를 걸세. 그것은 우리 민족 모두의 한이었다네"
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의 분발을 촉구했었다.
해방 후 손기정.남승룡.권태하.김원배 등 우리나라 마라톤의 원로들과 <조선마라톤 보급회>를 만들어 후진육성을 시작했는데 재정의 뒷받침은 모두 인촌선생이 해주신 것이었다. 그 때도 돈 가진 분들은 많았지만 우리가 찾아가면 귀찮아 하실 뿐 이해와 격려를 해주시는 건 인촌선생님 뿐이었다. 그는 초기 우리 마라톤에서 대부같은 기여를 했다. 그 결과로 1950년 보스턴 마라톤에서 함기용.송길윤.최윤칠 선수들이 1,2,3위를 다 차지해 기염을 토했고, 동아일보에서 만든 동아마라톤은 바로 한국 마라톤의 산 역사인 동시에 한국 마라톤의 성장과정을 그대로 보여준 가장 전통 있는 경기대회이기도 하다.
인촌선생은 스포츠의 육성을 민족운동의 하나로 생각하셨고 스포츠가 뭔지를 아신 분이었다. 당시 보전운동장은 전국에서 제일 훌륭한 경기장이었고, 선생님은 이 경기장을 만들 때 본관 건물과 맞먹을 정도의 투자를 하여 건설한 것으로 알고 있다. 청년들에게 스포츠가 얼마나 중요한 가를 행동으로 모범을 보인 것이었다. 우리는 그 론그라운드에서 연습을 했는데 연습을 지켜 보시며 잡초를 뽑아 내셨는데 우리가 달리면,
"잔디밭에서 하는 건 좋은데 한 곳으로만 뛰면 잔디가 살지 못한다. 여러 군데로 고루 뛰어다녀, 알겄지?"
그 분이 잔디를 얼마나 아끼시는지 잘아는 우리는 다음부터 선생님이 계시면 운동장에서 하지 않고 뒷산으로 뛰어 올라가 연습하곤 했다.
내가 동아일보 기자시절, 동료들과 함께 계동의 인촌댁엘 갔다. 엄동설한이었던 것으로 보아 정초였던 것 같다. 날씨가 무척 추웠다. 방안으로 들어 가면서 이구동성으로 춥다는 말을 되풀이 했다. 그러자 선생은 혼잣소리로,
"저렇게 따뜻히 입고도 춥다 하는데 헐 벗고 가난한 이들은 얼마나 추울까?"하셨다.
부자집 아들로 태어나 살아 왔으니 보통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기 어려운데 그 분은 다른 이들과 그런 점이 달랐다.
설산과 인촌 두분의 인간적. 정치적 판단의 기저에는 언제나 모두 애국애족이라는 사상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난세를 이겨 나가는 정치가에게 흔히 보이는 냉혹하고 잔악한 면이 없었다. 지혜롭고 해박한 설산을 옆에서 컨트롤 한 인촌은 태어날 때부터 보스쉽을 지녔다고 할 수 있겠다. 특히 인촌은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려 있다는 것과 그런 연후에라야 바로소 중지를 한데 모아 수렴하고 결정하는 민주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아울러 정치자금을 유용하게 대는 경제적 배경과 필요한 곳에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투입하는 결단이 그를 선각한 지도자로 만든 요인이었으리라.
내가 고려대학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45년 광복과 더불어서이다. 귀국하자 외국에서 공부한 사람이 드문 시절이라 <서울대><연대>등에서도 오라고 했지만 난 고대를 택했다. 그 연유는 나도 독립운동을 좀 했고, 평소 인촌선생을 존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그 당시에는 동아일보를 한국의 정부로 생각했었다. 말이 쉽지 일제의 탄압 아래서 <신문경영><학교경영><기업경영>등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임시정부를 좀 알아서 김구나 이승만 등 지도자들을 많이 알았지만 인촌만큼 훌륭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인촌의 가장 존경할 만하고 훌륭한 것은 사람 모으는 힘을 가진 지도자라는 점일 것이다. 근래의 역사 가운데 인재를 제일 많이 기르고 모은 분이라 생각된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고대를 택했는데 올해로 35년째다.
인촌의 이미지를 한 마디로 떠올려 말하려 하면 잠시 망설여진다. 그는 언론가요, 실업가이며, 교육자에다 정치가였다. 그러나 선생은 참다운 애국자이지 않았나 생각된다. 여러가지의 일을 했던 것은 모두 나라와 민족을 위한 애국심의 발로일 것이다. 그는 꿈에서조차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할 만큼 진솔한 자세로 힘든 세상을 살았다.
인촌에 대해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사업에 대한 치밀함 말고도 그 사람됨에 있어 공선사후의 신조에 따라 생각과 행동이 일치했다. 한번 맺은 교분이나 정을 헛되이 저버리지 않았고, 온후하고 사상이 곧되 겸손했다는 점은 빛나는 면이었다. 그렇게 보기 드문 인재이기에 여태껏 본받고 존경해도 마땅하리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