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대 최정호 석좌교수 특별기고
동서독이 통일된 후 '만프레드 슈톨페 사건'이라는 것이 있었다. 옛동독의 공산당 독재치하에서 꿋꿋하게 신앙과 지조를 지켜온 슈톨페 목사는 그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반체제 인사들을 감싸주고 그들을 서방 세계로 안전하게 이주케 하는 데도 음양으로 도움을 주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었다.
1990년 독일이 통일되자 과거 동독의 '슈타지(국가보안부 소속 비밀경찰) 기밀문서 내용이 들춰지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슈톨페 목사에 관한 슈타지 기밀문서가 공개되면서 엄청난 정치적 스캔들이 불거져 나온 것이다.
수톨페 목사는 반체제 인사가 아니라 동독의 집권당 간부들과도 빈번하고 더러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사실이 '폭로'되었으며 그래서 그는 체제의 '동조자'요, 심지어 '슈타지의 끄나풀'이었다는 비난과 비방이 쏟아져 나왔다. 어떤 변명도 그가 동독의 당 간부 누구와 어느 날 어디서 만나곤 했다는 구체적인 기록 문건 앞에선 설득력이 없어 보였다.
그때 슈톨페 목사를 정면으로 변호하고 나선 인물이 전 함부르크 시장 클라우스 폰 도흐나니박사. 그는 명문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로 있던 크리스토프 폰 도흐나니의 형이다.
만일 동독의 공산당 독재치하에서 집권당의 요인들과 어느 정도의 관계와 접촉을 유지하지 않고 있었더라면 슈톨페 목사가 어떻게 반체제 인사들을 비호하고 그들의 서독행을 도울 수가 있었겠느냐고 도흐나니박사는 반문하고 나선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나치 독일의 군사정보국 책임자로 있었던 카나리스 제독도 제3제국에 대한 가시적인 충성의 표시 없이 어떻게 그 고위직을 유지하며 저항세력을 비밀리에 모아서 반(反)히틀러 음모를 꾸밀 수가 있었겠느냐고 따졌다. 카나리스 제독이 긴요하게 구출해야 될 유대인 과학자나 예술가들을 국외로 탈출시킬수 있었던 것도 그에 대한 나치 집권층의 신뢰가 구축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불행히(?), 혹은 다행히(!) 카나리스 제독의 반히틀러 음모가 탄로나서 체포돼 처형되었으니 망정이지, 만일 그가 무사히 살아남았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후세 사람들은 그를 당시의 지위만 보고 나치의 거물로 매도해야 마땅하단 말인가 하고 도흐나니 박사는 다그친다.
그렇다고 해서 슈톨페 목사나 카나리스 제독을 옹호하는 도흐나니박사가 나치정권이나 공산정권을 소극적으로나마 용인한 인물은 전혀 아니다. 그의 외삼촌은 히틀러에 대한 저항운동으로 카나리스 제독과 같은 날 같은 강제수용소에서 처형된 세계적으로 저명한 독일 고백교회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이다. 그리고 도흐나니 박사는 공산당과는 견원지간(犬猿之間)인 서독 사회민주당의 정치인이다.
카나리스 제독, 슈톨페 목사의 '사건'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외세의 식민지 통치 하에서건, 백색 또는 적색 독재체제 하에서건 그 속을 뚫고 살아 나온 사람들의 지조를 가리는 이른바 '과거청산' 문제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당시의 상황을 멀리 벗어나서 조망하는 국외자(局外者) 내지 후세인들이 흔히 저지르고 있는 것처럼 그리 함부로 속단할 수 있는 쉬운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물론 카나리스 제독의 반히틀러 저항운동은 OE하세가 주연한 왕년의 영화 '카나리스'를 통해서도 전후의 세계에 널리 알려졌고 슈톨페 목사의 동독 공산정권 하에서의 행적도 깨끗이 소명되어 그는 지금 포츠담에 주(州)청사가 있는 브란덴부르크주 정부의 수반으로 선임되어 현직에 있다.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치하에서 민족언어로 민간신문을 발행한다는 것, 그래서 민족문자(한글)의 근대화와 그 보급에 앞장서고, 또는 문맹퇴치 운동을 벌이고 나아가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벌이고 다시 민족문학의 맥을 잇기 위해 신춘문예작품 공모를 제도화하고, 혹은 민족경제의 개발을 위해 물산장려 운동을 펼치고, 심지어 임진왜란의 두 항일(抗日) 영웅 이순신 장군의 아산 현충사와 권율 장군의 행주산성 사당을 중건 중창하여 민족사를 지키는 일에도 앞장선다는 것. 그것은 친일파나 친일신문이 했던 일도 아니고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더욱이 중국 침략에 이어 전 세계를 향해 전쟁을 확대해 간 단말마적 일본 군국주의 총독정치 치하에서 갈수록 숨통을 죄어오는 '사상통제'와 언론통제를 받아가면서 기댈 곳 없는 식민지 동포를 위하여 매일매일 신문을 제작 보급한다는 것. 그것은 오늘날 냉난방이 잘된 도서실에 앉아서 생각하는 것처럼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신문은 언제 어디서든 그 시대상황의 '현실적' 제약속에서 제작된 산물이다. 어떤 압력도 느낄 수가 없는 서재 공간에서 후세의 학도들이 옛 신문철을 펼쳐보고 인쇄된 지면의 이른바 '실증적'인 내용 분석만 하면 한 신문이나 그 발행인.편집인의 진실이 들춰지는 것은 아니다.
이미 소비에트 체제가 붕괴되기 훨씬 이전부터 서방의 전문가들은 소련 신문에 대해서 단순히 활자화된 지면만을 평면적으로 보지 않고 활자화되지 않은 '행간(行間)을 읽는' 심층적인 분석 기법을 개발해 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동아일보가 폐간되기 직전 총독부의 언론통제와 탄압이 극에 달한 말기의 지면만을 뒤져가며 광복 후 50년이 지난 21세기 초의 오늘날에까지 민족지를 친일지로 매도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어이없는 상황은 친일.민족반역자를 일찌감치 숙청.청산하지 못했던 대한민국 초대 정부의 역사적 사보타주에 그 일차적 책임이 있다. 친일분자를 제때에 바로 특정(特定)하지 못하고 덮어두었으니 일제강점기의 상황에 어두운 후세인들이 그 범위를 멋대로 넓힐 수 있는 소지를 남겨 놓은 셈이다. 그것은 마치 패전후의 일본이 과거를 청산하지 않고 덮어두고 있음으로 해서 우리가 오랫동안 일본과 모든 일본인을 도매금으로 적대하고 경원해 왔던 것과 비슷한 경우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아일보가 총독부에 의해서 강제 폐간됐다가 광복 후 복간돼 창간 82주년을 맞은 오늘날, 새삼 인촌(仁村)의 행적이 공론권에서 곡해되어 논의되고 있다는 것은 더욱 근원적으로는 한국의 현대사 연구와 현대사 교육의 개탄해마지 않을 가보타주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것이 한국현대사의 위기요, 한국지성사, 한국지성사회의 위기적 상황이라 여겨지는 것이다.
일제 강점하의 한반도가 35년에 걸쳐 겪은 역사는 관변의 또는 민간의 국사편찬가들이 히을 경주하여 연구하고 있는 것처럼 단순히 '해외'의 애국지사들이 펼친 찬란한 '독립운동의 역사'로만 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제 35년의 식민통치자는 1차적으로 그리고 더 보편적으로는 이 땅에서 이 겨레가 겪은 '국내'의 역사이다. 그것은 해외 독립투사들의 자랑스러운 광복운동의 역사이기에 앞서, 그 이상으로 힘없고 이름 없는 백성들이 당하고 짓밟히고 빼앗기고 끌려가고 업신여김 받고 부끄러움을 견딘 수모와 수난의 역사였다. 혹은 '역사' 이전의 의미 없이 반복된 '일상성'의 연장이었다. 그렇기에 그것은 광복 후에는 거의 기록되지 않고 따라서 기억되지도 않는 '망각의 역사'가 되어버렸다.
광복을 맞자 해외 망명에서 화려하게 돌아온 독립투사들의 프로필은 크게 부각되고 그들의 업적은 대서특필되곤 하였으나 국내에서 당하고 짓밟히고 수모 받은 백성들의 '실존적'인 식민지 체험은 독립만세의 함성과 함께 기화(氣化)하여 하늘로 사라져버렸다.
그 결과 일본을 향해 과거를 속죄하라고 호통을 치면서도 일제 치하에서 얼마나 많은 이름 없는 동포가 징병과 징용으로 끌려가고 군위안부로 끌려갔는지는 아무런 기록도 챙기지 못하고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어쩌다 양심적인 일본 학자가 식민통치의 기록들을 뒤적이다 군위안부에 관한 자료를 들춰내 주면 그걸 들고 항일 시위를 하는, 창피스러운 일조차 이따금 보게 되곤 한다. 일상성으로서의 일제식민지사에 대한 연구를 소홀히 해온 업보이다.
총독 통치하의 식민지 백성의 일상 세계에 대한 연구와 이해 없이는 해외가 아니라 국내에 남아서 민족을 이끌어온 지도자들의 위상과 역할도 밝혀질 수가 없다. 그와 마차가지로 식민지 생활의 실존적 체험이 추상된 공간에서는 인촌 선생이나 동아일보의 위상과 역할도 밝혀질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일상성으로서의 현대사를 밝히고 알리는 일이야말로 신문이 맡아서 해야 하는 중요한 기능이다. 나치의 과거를 모범적으로 청산한 것으로 알려진 전후의 서독에서 이름 있는 신문 잡지마다 '현대사(Zeitgeschichte)'란을 고정란으로 두어 뒤에 오는 세대를 위해 일상세계의 현대사에 관한 계몽 교육을 펼쳐왔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런 일을 소홀히 해 왔다는 점에서 동아일보 자체에도 책임이 있다고 해야 될 것이다.
창간 82돌을 맞는 동아일보가 새로운 세개를 열어갈 길은 어디에 있는가.
인촌으로 돌아가라, 인촌의 동아일보 창간 정신으로 돌아가라는 말 이상의 다른 말을 할 수 없다.
인촌이 대체 누구이고 그의 동아일보란 어떤 신문이었단 말인가.
학병으로 끌려간 일본군대에서 탈주하여 광복군에 합류하고 광복 후 귀국한 김준협(金俊燁) 박사는 '임시정부'를 좀 알아서 김구나 이승만 등 많은 지도자들을 가까이 하게 되었지만 인촌만큼 훌륭한 분을 보기는 어려웠다고 말하고 있다. 일제 치하를 국내에서 살다가 중국으로 건너가 광복운동에 참여함으로써 당시의 '안'과 '밖'을 두루 체험한 그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일제시대, 그 당시에는 동아일보를 한국의 정부로 생각했었다"고.
- 1933년 전북 전주 출생
- 서울대 철학과 졸업
- 베를린 자유대 철학박사
- 한국일보 유럽특파원, 한국 중앙 조선일보 논설위원
-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교수(76~99년)
- 한국신문학회장, 한국미래학회장, 문화비전 2000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