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석 신태수 윤택중 선생의 1964년 원고
2019년 봄, 류희춘 선생(고려대 62학번)이 인촌 김성수 선생에 관한 오래된 원고 묶음 3편을 인촌기념회에 전달했다. 하나는 김형석 (1920~ ) 연세대 명예교수의 원고이고 또 하나는 건국대 재단이사장을 지낸 신태수(1896~1988) 선생의 글, 그리고 제9대 문교부 장관을 지낸 윤택중 (1913~2002) 선생과의 대담 원고이다. 1963~1964년 무렵 류 선생이 재경고창학우회장을 맡았던 시절 청탁하거나 직접 작성한 원고 3편을 옮겨 소개한다.
김형석
셋이 같이하면 반드시 한 사람의 스승이 있다는 옛 교훈이 있다.
비록 단 둘이 걷는다 해도 우리들의 마음쓰기에 따라서는 같이 가는 사람을 통하여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그의 단점이 나에게 충고가 될 것이며 그의 좋은 점은 나의 발전을 도울 수 있겠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스승 위인들을 외국에서 찾아 왔다. 역사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스승 위인들이 있었던 때문이다. 지금도 우리는 역사의 위대한 인물들을 많이 기억하고 있으며 또 존경을 바치고 있다. 깐듸나 슈바이처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며 아인슈타인의 업적 케네디 대통령의 뜻을 아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스럽게도 우리들의 역사를 통하여 전 국민이 존경할 만한 인물의 수는 그리 많지 못한 것 같이 생각된다. 적은 것은 아니겠지만 선배들이나 역사가들이 그분들의 뜻을 바르고 값있게 전해주지 못한 것이 그 하나의 원인이 되어 왔는지도 모른다.
더욱 유감스러운 일이 있다. 우리는 우리들 주변에서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 되는 몇 분의 선배 스승이라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때로는 그들이 길을 잃은 우리들의 지남침이 되며 삶의 갈랫길에 부딪쳤을 때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면 오늘 우리들의 생활은 얼마나 믿음직스러우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러한 지도자 선한 선배를 가지지 못하고 있다.
없는 것은 아니지만 찾지를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주변과 이웃들 속에서 좋은 분들을 찾아낼 만큼 우리들의 마음의 자세가 바르지 못하며 스스로가 보람있는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만일 우리들의 정신적 소양, 사회생활의 선한 뜻만 갖추어져 있다면 우리는 이웃사람들의 단점보다 장점, 약한 점보다 조금씩이라도 훌륭한 면들을 서로 찾아가며 장려해 가는 생활을 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것을 생각할 때마다 기억에 떠오르는 한 분이 있다.
사람마다 생각이 조금씩 다르겠지만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중의 한 분이 인촌 김성수 선생이다.
그분은 업적에 비하여 그리 널리 알려진 분은 아니다. 그이보다 많이 알려진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그분은 국민들의 주목을 받을만한 지위에 오래 머물지도 않았다. 잠시 부통령직을 맡은 바는 있었으나 그리 긴 기간의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우리나라의 근대사를 통하여 그분만큼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은 없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아마 지난 1세기 동안 가장 존경받을 만한 뜻과 업적을 남긴 이 중의 으뜸되는 분이 바로 인촌 선생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우리 민족역사를 통하여 언론다운 언론기관이 있었다면 동아일보를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동아일보가 그분의 재산과 뜻에서 이루어졌다.
우리나라에 진정한 의미의 민족적 교육이 있었다면 대학에서는 고려대학 중등교육에서는 중앙중고등학교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서울대학이 일인들의 손으로 세워졌으며 연세대가 미국인들의 뜻에 의하여 건설되었다면 고대야말로 강한 민족정신의 집결체였다고 보아 잘못이 아니다. 중앙고보가 어떠한 학교였던가는 아는 사람들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인촌 선생의 뜻과 재산에 의하여 이 두 교육기관이 자랐다는 것은 누구도 가벼이 볼 수 없는 업적이다.
그러나 한국경제를 걱정하신 선생은 다시 기업다운 기업을 뜻하여 여러 사람의 협력을 얻어 경성방직을 창건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 옛날 뜻있는 생산과 경제면에도 큰 뜻을 남기겼던 것이다. 태극성 광목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애용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눈에 보이는 일들 보다도 더 훌륭한 일을 하셨다. 많은 인재들을 길렀으며 훌륭한 일꾼들의 뒷받침을 해주었다는 일이다. 그분을 중심 삼거나 그분 밑으로 얼마나 많은 인재들이 쏟아져 나왔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지고도 남은 일이다.
이렇게 선한 뜻과 훌륭한 일들을 남겨준 분을 생각하며 그런 분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즐겁고 보람있는 일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한 분의 뜻과 정성이 이렇게도 많은 업적을 남길 수 있었을까. 많은 사람들은 그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던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재산을 따진다면 비단 그 분에게 국한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어떤 이들은 그를 복받은 행운아라고 말하기도 한다. 친구와 환경이 좋았고 시운(時運)을 탔던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분은 환경을 만들었으며 친구들을 찾아다닌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의 활동기만큼 민족역사의 수난기가 없었으며 처세하기에 곤란스러웠던 때도 없었을는지 모른다.
어쨌든 우리는 그분에게서 다음과 같은 한가지 사실만은 배워서 좋을 것으로 믿는다.
그는 자신의 재산과 정성으로 동아일보를 창건했다. 그러나 곧 동아일보의 사장책임은 친구였던 송진우 선생에게 맡기셨다. 만일 그분이 사장자리를 원하는 분이었다면 누구도 그분이 사장 될 자격이 없다거나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또다른 일을 위하여 사장직을 친구에게 맡긴 뒤에는 곧 다른 일에 손을 대셨다. 한가지 일이 정리됨을 보자 다시 다른 친구에게 그 책임을 맡기고 자기는 다시 새로운 일에 뜻을 두셨다. 교육 언론계의 일들이 정돈되자 곧 기업계를 도우셨고 해방과 더불어는 정치운동에 뜻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분의 마음과 뜻을 잘 아는 이들은 그의 정치생활이 결코 자신의 영광이나 부귀 명성을 위한 바가 아니었음을 곧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언제나 조국과 백성을 위한 뜻으로 일관하였다.
이승만 박사가 초대 대통령으로 피선되었을 때의 일이다. 일반 여론은 인촌 선생이 국무총리로 될 것이라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미국측의 생각도 거의 같은 방향으로 기울어졌던 것 같다.
그 때 나는 우연히 계산 밑에서 인촌 선생을 뵈었다. 기자들을 피하여 산책을 올라오셨던 것이다. 누군가가 “선생님 요사이 국무총리가 되신다는 여론이 높던데....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라는 질문을 꺼냈다. 그 얘기를 듣고 계시던 인촌은 “왜 송진우 선생께서 먼저 세상을 떠났겠습니까? 그분이 살아만 계신다면 무슨 일을 해서래도 그분을 국무총리로 모셔야겠는데....” 라고 말끝을 흐렸다. 대답하는 인촌의 두 눈에는 눈물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인촌 선생의 좋은 점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느끼고 있다. 언제나 보다 유능한 분을 뽑아 윗자리로 모시려 하는 생각, 소위 감투는 남에게 씌우고 뒤에서 또다른 일을 계획해 나가는 뜻. 이 뜻이 다름아닌 인촌의 정신이었고 그 뜻 때문에 그분은 보다 많은 업적을 남길 수 있었을 것으로 믿는다.
그리고 그 뜻은 어디서 왔는가? 진정한 애국심, 나는 민족을 위하여 반드시 있어야 할 일을 하면 된다는, 먼저 조국 그리고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남을 헐고라도 높은 지위를 탐내는 많은 정치가들, 보다 유능한 사람을 떨구고라도 자기의 지위만 보장되면 그 뿐이라는 대개의 지도자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귀한 정신이다.
사실은 모든 사람들이 그와 꼭같은 정신을 가져야 하겠는데도 불구하고....
한 가지 이야기만 더 소개하기로 하자. 6.25때 일이다. 부산으로 피란갔던 우리 몇 선생들은 앞날이 아득한 생활들을 걱정한 나머지 선생 한 사람을 진해로 보내 인촌 선생에게 괴로운 심정이라도 여쭈어 보기로 했다.
공교롭게도 내가 그 대표로 뽑혔다. 인촌 선생은 우리들이 봉직하고 있는 중앙학교의 설립자였으며 나는 그때까지 선생을 직접 뵈온 바도 없는 이름없는 한 풋내기 교사에 불과했다.
내가 진해에 머물고 계시는 선생을 찾았을 때는 이미 늦은 오후였다. 인사를 드리고 마음으로부터 민망스러운 몇 선생들의 뜻을 전해 드렸다.
선생은 “그거 참 안됐습니다. 여러 기관의 분들이 다 어려우신 모양인데 특히 이런 때는 선생님들이 더 고생스러우시겠습니다. 어떻게 힘이 미치는 대로 해보도록 하십시다” 라고 대답하셨다. 나는 분에 넘치는 어려움을 드렸는가 싶어 무척 송구스러웠다.
그날 밤을 같이 쉬고 다음날 아침이 되었다. 조반을 끝낸 뒤 선생은 “좀 생각해 보았는데 우선 내 통장에 48만원이 남아 있습니다. 3만원만 남기고 찾아다 드릴테니 몇 선생님들이 어려우신대로 지나도록 해 보십시다. 전쟁이 쉬 회복되면 문제 없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얼마 후에 다시 한번 의논해 보십시다” 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45만원이나 되는 큰 돈을 받고 발걸음이 더욱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선생은 나에게 영수증을 요구하지도 않았으며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을 때 그저 맡아서 잘 처리해 달라는 부탁 뿐이었다. 그 때 선생은 내 이름조차도 잘 기억 못하고 계신 때였다.
대문 밖으로 나오면서 인사를 드리려 했다. 그때 선생은 잊었다가 생각이 난 듯이 “아아 참, 김선생, 부산 가시면 서면을 지나시게 되지요? 거기 내 큰아들 집이 있는데 내 아내가 지금 거기 가 있습니다. 돌아올 때 다다미 껍질을 여나문 장 사오라고 부탁했는데 새것을 사면 한 장에 200원이고 낡은 것을 뒤집은 것은 한 장에 150원 한답니다. 새것보다는 낡은 것을 사오도록 좀 얘기해 주시겠어요?” 라는 부탁이었다.
나는 그렇게 전해 드리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는 퍽 죄송스러운 생각이 떠올랐다.
당신의 개인생활은 저렇게 절약하시는 분이 우리들의 생활을 위해서는 큰 돈을 아끼지 않는 뜻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역시 누구보다도 지성으로 사시는 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