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인촌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는 1891년 10월11일 지금의 전북 고창군 인촌리에서 지주(地主)인 김경중(金暻中)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던 이 시기는 일제를 비롯한 외세의 침략으로 조국의 운명이 기울어가던 시대, 즉 한국 근대사의 비극이 고조되어가는 불운의 시대였다. 김성수의 집안은 16세기 조선전기 당대의 최고 성리학자였던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를 배출했던 명문가였다. 김성수는 세 살 때인 1893년 상속할 아들이 없는 큰아버지 김기중(金祺中)의 양자로 들어갔다.
그는 유년기때 부모로부터 양반이 갖춰야할 예의범절과 한문 등을 배웠다. 열두살 때인 1903년, 전통관습에 따라 자신보다 다섯살이 많은 고광석 (高光錫 1886-1919)과 결혼했다.
그는 장인의 도움으로 1906년 창흥의숙에서 영어 등을 배우면서 훗날 그의 가장 절친한 친구이자 동지가 되는 송진우(宋鎭禹 1894-1945)를 만났다.
인촌리에서 줄포로 이사한 1907년, 김성수는 전북 부안의 내소사(청련암)에 가서 송진우 백관수(白寬洙 1889-?)등과 함께 수학했다. 이곳에서 그는 일본에서 공부하고 싶은 희망을 키워나갔다. 이듬해인 1908년 4월 줄포 근처의 후포에서 있었던 한 공개강연을 통해 김성수는 근대적 사상의 세례를 받았다.
시민권, 평등, 주권재민의 사상등을 배운 것이다. 이를 계기로 그는 금호학교에 입학해 영어 한국어 역사 지리 물리 화학 음악 등 본격적인 근대 학문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의 새로운 교육을 통해 일본이라는 넓은 세계로 나아가 더욱 깊이 있고 더욱 새로운 학문을 배워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물론 부모님과 아내의 걱정과 만류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1908년10월 상투를 자른 자신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사죄의 편지를 부모에게 남기고 친구 송진우와 함께 군산항에서 일본행 배에 몸을 실었다.
그 때 김성수의 나이 열일곱이었고 조국의 주권은 사실상 일본에 빼았긴 상태였다. 김성수의 일본 유학을 만류하던 부모와 부인도 그의 의지와 결단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김성수의 청년기는 일본 유학으로 시작됐다. 송진우(宋鎭禹)와 함께 일본 도쿄로 건너간 김성수는 우선 중등학교 입학을 위한 예비학교인 세이소쿠(正則) 영어학원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영어와 수학 등을 배웠으며 일본어는 가정교사로부터 배웠다.
그는 송진우와 함께 1909년4월 긴조(錦城)중등학교 5학년으로 편입했다. 그리고 다음해인 1910년 4월 김성수는 역시 송진우와 함께 명문 와세다 대학에 입학했다. 그리고 4개월 뒤인 8월29일, 조국 땅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송진우는 침략자 일제의 수도인 도쿄에서 공부할 수 없다며 조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김성수는 일본에 남아 공부를 계속했다. 송진우와 같은 행동이 충분히 이해는 되지만 조국의 독립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못할 것이라는게 김성수의 신중한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절친한 친구 송진우는 귀국했지만 김성수는 도쿄에 머물면서 와세다대학 예비과정을 마치고 와세다대학 정규과정에 들어가 정치경제학을 전공했다. 김성수가 일본에 체류한 기간은 1914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모두 6년이었다.
이 일본유학 기간은 김성수의 문화민족주의 사상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조국의 장래를 위해선 근대화가 급선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는 일본 유학 기간 동안 일본의 앞선 근대화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사춘기의 민감한 한국의 젊은이 김성수는 일본의 근대화를 따라 잡지 못하면 조국의 독립은 요원할 것이란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와세다대학의 교육 과정이 자신의 청년기에 있어 가장 의미있고 기억에 남는 경험이었다"는 자신의 회고처럼 일본 유학 기간 6년은 김성수의 내일을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시기였던 셈이다.
근대화된 민족교육이 필요하고 근대화된 민족기업이 필요하다는 신념이 이때 확고해졌기 때문이다. 아울러 일본 유학기간 동안 한국의 미래를 이끌어 나갈 유능한 젊은 인재들을 만났다는 점도 김성수에겐 매우 각별한 것이었다. 김성수는 당시 송진우는 물론이고 장덕수(張德秀 1895-1947), 현상윤(玄相允 1893-?) 김준연(金俊淵1895-1971) 최두선(崔斗善 1894-1974) 안재홍(安在鴻 1892-1965) 신익희(申翼熙 1894-1956) 등을 만났다. 이들은 훗날 김성수가 학교 신문사 방직공장을 운영하는데 있어 커다란 도움을 준 인물들이었고 그들의 도움은 그야말로 헌신적인 것이었다.
김성수는 1914년7월 고향으로 돌아왔다. 일본으로 건너갈 때 10대의 어린 소년이었던 김성수가 6년 뒤 세상에 눈 뜬 청년이 되어 조국의 근대화, 교육 문화운동에 대한 깊은 야심을 가득 채우고 조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조국은 식민지로 변해버렸지만 그 황폐한 한국땅에 문화의 꽃을 피우기 위한 김성수의 희망은 본격적으로 싹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