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화

어른들 몰래 신천지 동경으로

일본에서 일본에서

군산 금호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있는 동안에는 仁村은 상투를 자르지 않았다고 한다. 신식 학교였기 때문에 학생들은 거의 단발을 했고 함께 공부하던 근촌 백관수도 상투를 잘랐는데 仁村만이 상투를 하고 다녀 애신랑이란 놀림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엄격한 집안의 가풍과 어른들의 반대가 있을까봐, 그리고 동경유학의 계획을 눈치 챌까봐 그냥 결발을 하고 다녔다. 하지만 마음만은 좀더 넓은 곳으로 나가 학문을 해야겠다는 향학열에 남보다 더 불타고 있었다.

이즈음 집에서 심부름꾼이 군산으로 나와 부친의 서찰을 전해 주었다. 그때 仁村은 백관수와 함께 객주 집에서 기숙하고 있었다. 오늘날처럼 하숙 집이 없고 보니 여관업을 대행하던 객주 집에서 숙식하며 학교를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생정 부친 지산공의 서찰 내용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한양에서 배편으로 손님이 온다는 것과 그 손님을 마중하여, 보내는 하인과 함께 줄포 집에 모시게 하라는 것이었다. 손님이란 다름 아닌 홍범식이었는데 마침 금산군주로 발령받고 임지로 가는 길이었다. 홍범식은 仁村의 부친 지산공과 전부터 교의가 두터운 사이어서 임지로 가는 중에 지산공을 심방하고 가려고 온 것이었다. 도임지를 가는데 육로를 택하지 않고 제물포에서 화륜선을 타고 군산으로 온 것은 육로보다는 해로가 편리했기 때문이다.

仁村은 부두에 나가 홍범식을 마중했다. 그는 아들과 함께였는데 仁村보다는 서너 살 위로 보이는 중학생이었다. 까만 제복을 입고 모자를 썼는데 그렇게 인상적일 수가 없었다. 홍범식의 아들은 일본 유학생이었고 마침 방학 때라 부친을 따라 왔던 것이다.

仁村은 객주 집에서 그 중학생과 오랫동안 얘기를 나누었다. 그는 벽초 홍명희였다. 벽초는 당시 동경 <다이세이> 중학교에 다니던 학생이었다.

仁村도 내심 동경유학을 꿈꾸고 있던 터라 벽초를 만나자 궁금했던 모든 것을 물어 보았다. 벽초는 서구 열강의 신문화와 기술을 받아들여 급속히 부흥하게 된 일본의 발전상을 소개했다. 仁村은 정치 경제 이외에도 일본의 교육제도나 시설 등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물었다. 벽초는 아는대로 설명해 주었다.

객주에서 하룻밤 묵은 홍범식 부자는 인도차 나온 하인을 따라 줄포 집으로 떠났다. 벌써 仁村의 마음은 부풀어 있었다. 하룻밤을 곰곰 생각한 끝에 동경유학을 결심하게 되었다. 仁村이 동경유학을 결심하고 있을 때 손곡리에 있던 古下 송진우가 느닷없이 찾아 왔다.

"아니 자네 언제 상투를 잘랐나?"

仁村은 송진우의 변한 모습에 놀라서 물었다.

"한 가지 결심을 했거든? 나 지금 상경하는 길일세"

"뭐야? 상경? 왜?"

"아버님과 상론을 했더니 교원이 되는 게 좋겠다고 그러시더군! 서울엔 한성교원양성소가 있대. 자네두 우물 속 같은 이 시골 바닥에 있지 말구 나와 함께 상경하자구. 그래서 가는 길에 온거야"

송진우는 그렇게 서둘렀다.

"별루 좋은 생각이 아니야"

"왜?"

"서울에 가서 뭘 배우겠나? 난 이미 동경 유학을 결심했어. 언젠가 그랬지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 승한다구. 적도에 들어가 공부하기로 이미 결심했네. 날 따라 갈텐가? 아니면 시골 구석의 교원이 될텐가?"

"동경유학? 맞어!"

송진우는 감격한 듯 仁村의 손을 꽉 잡았다.

"바루 그거였어, 적도! 심장부로 들어가 뜻을 세워보자구"

송진우는 두 말 없이 仁村의 의사에 동의하고 나섰다. 두 사람은 동경유학을 결정했다.

"관수는 어디 갔나?"

"흥덕 집에 일이 있어 갔다네"

"관수는 아는가?"

"아직 모르지"

"그렇다면 빨리 연락해서 관수도 함께 가기루 하세"

"그러지"

"우리가 간다면 따르겠지만 문제는 동경으로 건너가려면 그 수속을 해야 할 텐데?"

"그것도 알아 봤네. 한선생님께 상의를 드렸더니 염려 말라구 하시더군?"

仁村은 동경행을 결심한 다음 사실은 담임 선생님이었던 한승이를 찾아가 상론을 했던 것이다. 한승이는 仁村에게 동경행 결심은 잘한 일이라고 격려를 해 주었고 수속 일절은 자기가 책임지고 다 마련해 줄 테니 줄포에 계신 집안 어른들의 승낙만 받아 오라는 것이었다.

"마침 잘 됐구먼.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어르신네의 승낙 뿐이구나. 어떻게 받아내지? 전에도 한 번 일본 유학을 말씀드렸다가 거절을 당했다면서?"

"그게 지금 가장 심각한 고민일세."

仁村은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처음 말씀드려 보는 것도 아니고 전에도 한 번 말씀드렸다가 거절을 당하고 다시는 입밖에도 꺼내지 말라 했는데, 또 찾아 뵙고 승낙해 달라고 해 봤자 불호령 뿐일거란 것은 자명했던 것이다.

仁村은 본인이 직접 나서기보다는 집안 어른들의 신임을 받고 있는 친지들에게 부탁하여 일본 유학의 당위성을 설득해 달라는 방법을 썼다. 그 친지 중의 하나가 군산에서 보통학교 교원으로 있던 일어교사 박일동 같은 사람이었다. 박일동은 仁村의 조부님과 양가 부친을 차례로 만나 仁村의 동경유학을 설득해 보았지만 어른들의 반대는 뜻밖에도 완강했다. 이유는 역시 국내의 정정이 불안한데 장손을 만리타국까지 보내어 공부시킬 수 없다는 것이었다. 조부와 생부는 물론 양부까지도 신학문을 가르쳐야 한다는 큰 포부로 영신학교를 설립하면서도 아들의 일본행만은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다.

仁村은 마침내 어른들 몰래 도일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흥덕의 고향 집에 가 있던 백관수는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쳐 동경유학에 동행할 수가 없다고 알려 왔다. 仁村, 송진우 두 사람이라도 가기로 했다. 드디어 담임선생 한승이는 두 사람의 도항증을 만들어 주었다. 떠나기만 하면 되게 되었다.

도항증이 나온 날 仁村은 객주 집에 돌아와서 목욕재계한 다음 부모님이 계시는 쪽을 향하여 재배를 올린 뒤에 상투를 스스로 잘랐다. 아무리 새로운 개화 세상이 왔다 해도 상투를 자른다는 것은 여간 대단한 이유와 결심이 없이는 스스로 자를 수가 없었다.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는 전통적인 유교사상을 가지고 있는 집안 어른들이 안다면 정말 대노할 일이었던 것이다.

"조부님 그리고 아버님, 이 막심한 불효를 용서하옵소서. 신천지에 가서 새로운 학문을 배우고 인격을 갈고 닦아 가문의 영광을 지키며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바로 잡을 수 있는 동량이 되어 돌아 오겠습니다. 조부님, 용서하옵소서"

상투를 자른 仁村의 눈에는 굵은 눈물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자른 상투를 소중하게 백지에 싸고 또 쌌다. 이렇게 됐으니 이제 성공하지 않고는 결코 돌아올 수 없다는 비장한 결심이 다시 서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이튿날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조랑말의 고삐를 쥐고 줄포 집의 머슴이 숨이 턱에 닿아 仁村이 묵고 있는 객주 집에 달려 온 것이었다.

"네가 웬일이냐?"

"서방님 큰일 났어라우. 안방 마님께서 편찮으시다고 빨리 오시라고 하는디요?"

"뭐가? 어머님이?"

"여기 서찰 있어라우."

머슴은 부친이 보낸 서찰을 품 속에서 꺼내 놓았다. 그것을 읽고 난 仁村은 깜짝 놀랐다. 모친이 급환이니 빨리 귀가하라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진우. 한선생 뵙구서 떠날 날짜를 며칠만 연기해 달라고 하게. 어머님이 편찮으시다는데 안 가 볼 수 는 없잖아?"

"집에 갔다가 잡혀서 아예 못 오는 거 아냐?"

"내 결심 변하지 않아. 기다리고 있으라구."

仁村은 머슴이 가져 온 조랑말을 타고 급히 줄포를 향해 떠났다. 길을 재촉하면서 仁村은 머슴에게 이것 저것 물어 보았다.

"그래 어머님은 대체 어디가 편찮으신거냐?"

"어디가 아프신가는 잘 모르겠지만 아프시긴 아프신 모양이라우."

"언제부터 앓아 누우신 거냐?"

"사 나흘 되셨능가 봅니다요"

"의원들은 다녀 갔구?"

"예? 예."

"집안은 무고허겠지?"

"예, 소인이 뭐 알것읍니까만은 서방님께서 만리타향으로 공부 떠나실라고 한다고 어르신네들께서 여간 근심 안 하셨습니다요."

仁村은 흠찔 놀랐다. 어머니가 병환 중이라는 것도 머슴의 말에 따르면 웬지 석연치 않았다. 급환이라면 병세 쯤은 자세히 알고 있을텐데 자꾸 어물어물하고 있었다. 게다가 놀라운 것은 머슴까지도 동경행을 알고 있는 점이었다.

"말을 세워라"

仁村의 엄명에 머슴은 흠찔하며 노상에 말을 세웠다.

"바른대로 얘기하지 않으면 큰 벌을 내리겠다. 어머님 급환이란 거짓말이지?"

"그, 그럴 리가요?"

"그런데 왜 어디가 아프신 지 얼마 만큼 아프신 지 지금은 어떠한 지 그런 건 왜 모른단 말이냐?"

"소, 소인이야 그걸 어찌 압니까요? 어르신네들이 그렇다 허니께 그런 줄 아는 거지요?"

"이놈, 말머리를 돌려라. 도로 군산으로 가겠다."

"아, 아니되옵니다요. 모셔오지 않으면 소인은 목이 달아납니다요."

仁村은 끝내 머슴으로부터 어머님 급환이란 거짓임을 밝혀냈다. 게다가 주막집 주인이 염탐꾼이라는 사실도 알아냈다. 머슴의 자복에 의하면 주막집 주인은 열흘에 한 번씩 줄포 집을 내왕하며 仁村의 동정을 집안 어른들께 알려 왔다는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仁村은 송진우와 함께 도일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다급해진 仁村은 줄포로 가지 않고 군산으로 돌아와 송진우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 놓고 머슴을 객주 집 에 하룻밤 묵게 했다.

"내일 당장 떠나야 겠네. 잘못 하다간 어르신네들에게 붙잡히고 말겠네."

"서두르자구"

두 사람은 떠날 차비를 했다. 仁村은 그날 밤 조부와 부모 앞으로 비장한 뜻이 담긴 서찰을 썼다. 그토록 완강히 반대하는 어른들의 뜻을 거역하고 동경으로 떠나는 불효와 장차 동경에 가면 어떤 공부를 하여 가슴에 품은 큰 뜻을 펼쳐 보겠는가 하는 것을 적고 꼭 성공해서 금의환향 하겠다는 내용을 담았다.

아침이 되자 仁村은 백지에 소중하게 간직한 상투와 서찰을 함께 싸서 머슴에게 주었다.

"이걸 가지고 어서 집으로 돌아 가거라"

머슴을 돌려 보낸 仁村은 송진우와 함께 급히 부두로 나갔다. 군산항 부두에는 신천지로 떠나는 화륜선 <시라까와마루>가 바다 위에 떠서 시컴한 연기를 뿜어 올리며 두 사람의 승선을 기다리고 있었다. 평생 나룻배나 고기잡이 목선만 타 본 두 사람은 엄청나게 큰 철의 동력선에 오르며 넓은 신세계로 나간다는 실감에 감격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화륜선이 군산 부두를 떠날 때 仁村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조국을 떠나 만리타국으로 수학의 긴 여정을 떠나는 것이었다. 상투를 스스로 잘랐을 때의 그 비장한 각오와 결심을 다시 한번 떠올리는 것이었다.

"가시밭을 달리는 한이 있더라도 꼭 성공해 돌아 오리라"

이때가 1908년 10월의 일이었고, 仁村의 나이 열 여덟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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