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 길의 두 부친
졸업 때가 가까워 올수록 교육구국의 꿈은 이제 하나의 신념이요, 목표로 변해가고 있었다.
일생을 교육에 바치겠다는 꿈은 시대적인 당연한 요청이기도 했고 仁村의 선각자적인 깨우침 때문이기도 했지만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은 <와세다>대학총장 <오오꾸마>의 감화도 있었다. 仁村은 후일 <오오꾸마>총장에 대해서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정직하게 말하여 나는 <오오꾸마>총장의 사상이나 그의 학설에는 그렇게 공명을 느꼈거나 감화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나는 <오오꾸마>백을 존경하던 사람 중의 한 사람임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나는 그에게서 사상이나 학식을 본 받기 보다 먼저 세상을 위하여 권권 일념을 잃지 않는 그 우국경세가로서의 지조에 많은 존경과 앙모를 가졌었다.
<와세다>대학은 1882년에 동경전문학교라는 이름으로 창설되었고 20주년이 되는 1902년에 <와세다>대학으로 개칭된 학교였다. 창립 30주년은 전 해였으나 명치왕이 서거하여 기념행사를 한 해 뒤로 연기했던 것이다.
仁村은 때맞춰 생전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나선 두 부친을 모시고 동경 시내의 명승지와 번화한 상가, 그리고 거리, 공장, 각급 교육기관 등을 안내했다. 두 부친은 급속하게 발전된 일본의 모습에 놀라기도 하고 경탄을 했지만 그 중에서도 큰 감명을 받은 것은 <와세다>대학의 기념행사였다.
일본의 총리대신이 참석하고 구미 여러 대학에서 온 대표를 비롯하여 내외 귀빈 2천 여명, 그리고 교직원 약 3백명, 재학생 1만여명이 넓은 운동장을 가득히 입추의 여지없이 메운 가운데 거행된 기념행사는 실로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운동장 주변에 마련된 좌석에 앉아서 수만 명이 넘는 학부모들과 그 행사를 지켜본 구식 두 노인의 심경이 어떠 했을까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두 부친은 2십 여일간의 체재를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떠나던 전날 밤 두 부친은 仁村과 아우 연수, 그리고 古下를 앉혀 놓고 이얘기 저얘기를 물었다. 대체 일본이 단시일 내에 저렇게 발전할 수 있었던 원인은 어디에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첫째는 우리가 쇄국을 하고 있을 때 저들은 개방을 하여 새로운 문물과 기술을 도입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발전의 원동력이 바로 교육에 있었다고 보아집니다."
仁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금부터 5십 여년 전까지도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더 못사는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1853년에 미국의 <페리> 함대가 대포를 쏘고 개항을 요구하자 일본은 무릎을 꿇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명치유신의 계기가 된 것입니다. 이때의 명치왕은 파산 직전의 철종 임금으로부터 조정의 대권을 물려 받은 대원군이나 오십보 백보였습니다. 그로부터 3십 여년이 지나갔습니다. 대원군은 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쇄국정책을 썼습니다만, 명치왕은 유능한 신하들을 얻어 재빨리 서양의 모든 것을 받아들여 국력을 일으켜 세웠던 것입니다. 그 3십년의 격차 때문에 한 나라는 다른 한 나라에게 먹히게 된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명치유신의 원동력은 역시 새로운 교육에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우리 민족이 일본의 기반에서 벗어 나려면 무엇보다 민족교육으로 양성된 인재들의 힘으로 따라가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됩니다."
"요원한 일이로구나!"
일본의 발전상에 압도된 원파공은 일본을 따라 잡아야 한다는 말에 탄식으로 대답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송진우가 한마디 했다.
"체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이 이 만큼 발전한 것은 겨우 3십 여년 걸려서 이룩한 성과입니다. 이곳에 와서 일본, 일본인을 샅샅이 살펴봐도 우리나라 사람만큼 창의성이 있고 우수한 민족이 없다고 느꼈습니다. 유능한 지도자들만 배출되면 저희 나라도 당장 일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이 사람들이 3십년 걸려 해 놓은 일을 어찌 저희들이라고 못하라는 법이 있습니까? 그들이 놀 때 놀지 않고 그들이 잠잘 때 잠자지 않으면 십오년이면 따라 잡을 수 있다고 감히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仁村과 古下는 몇 번이나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했다.
"일본을 보더라도 일본에게 강점 당했으니 저들이 각처에 관립학교를 세워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한 교육을 시행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큰 일입니다. 그것을 막을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민족교육을 할 수 있는 사립학교가 많아야 합니다."
한동안 묵묵히 듣고 앉아 있던 원파공은 넌지시 열정에 차서 토로하고 있는 아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졸업을 하고 고국에 돌아와 교육사업을 하겠다는 말이냐?"
"네, 아버님께서 허락만 해 주신다면 교육에 일생을 바칠까 합니다"
"으음"
뭔가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감았다가 뜨며 조금은 기특한 듯 물었다.
"어떤 학교지?"
"서울에 나가 중학교부터 해 볼까 합니다."
"서울에 가서?"
약간 실망한 듯 되물었다. 고향에 영신학교를 운영하고 있던 원파공은 아들이 그 학교를 맡아 보겠다는 줄 알았던 것이다.
"인생이나 사회경험도 전무한 네가 서울에다 중학교를 차리겠다구?"
"예"
"뜻은 갸륵하다마는……"
원파공은 약간 긍정적인 표정이었지만 지산공은 강경하게 반대했다.
"철부지 어린애가 하는 소립니다."
"대학을 졸업하는 나이인데 어린애라니?"
"그래도 뭘 압니까? 아직 이십 초반입니다. 꿈만 클 때죠. 그 꿈을 이룩하려면 경륜이 있어야 하는데 경륜이 생기려면 불혹은 돼야 합니다. 교육, 교육 하지만 나라에서 애쓰고 하려해도 어려운 게 교육인데 연소한 아이가 뭘 하겠습니다? 괜히 꿈만 꾸게 하지 마십시오. 중학교라니, 그런 헛 꿈은 버리는 게 좋다. 내가 나서서라도 못하게 할 테니 그리 알아라 교육사업은 아무나 하는게 아니야."
仁村은 방학 때 귀국해서나 편지로 두 부친에게 동경에 오시기를 간곡하게 권유했다. 대학졸업을 앞둔 仁村의 가슴에는 벌써 장래의 사업장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귀국해서 돌아 간다면 인재양성을 위한 민족교육학교를 만들어 문을 영어 보겠다는 포부를 갖게 된 것이었다. 그는 교육광복 민족갱생이란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자면 두 부친의 절대적인 후원을 받아야만 되었다.
그래서 仁村은 선진한 일본의 교육기관을 직접 두 부친에게 보여 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마침내 두 부친은 졸업을 앞둔 1913년 10월에 동경 나들이를 오시겠다는 기별이 왔다. 나들이 시기를 그때로 잡은 것은 마침내 <와세다>대학 창립 30주년 기념행사가 성대히 거행될 예정으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와세다>대학은 7백만원의 큰 재산을 가진 충실한 학부가 되었지만, 창립초에는 겨우 2만원을 얻어 교사기지 2천평 밖에 재산이라고는 없었다고 한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에도 설비와 건물이 빈약하기 그지 없었다. 처음에는 대학을 운영하기 위하여 <오오꾸마>총장이 매년 2천 5백원을 보조했다 하는데 이 돈을 가지고 학교를 유지해 나가던 당시 당로자의 고심은 내가 지금 교육사업에 손을 대어 보면서부터 더욱 절실히 느끼는 바이다. <와세다>대학은 그 동안 5백만원의 돈을 밖에서 기부로 거둬 들여서 금일의 대를 이뤄 놓았다. 이 교문에서 뒷날 일본 헌정을 운전하는 수 백의 유명한 정치가와 또 사회 각 방면의 인재를 배출시켜 일본의 문명을 건설한 그 국가적 공로를 생각하면 오직 경복할 뿐이다. <오오꾸마>백은 모든 정치적 공로가 매몰되는 날이 온다 할지라도 <와세다>대학을 통한 교육사업가로서의 공적은 만고불후하리라.
<오오꾸마>는 <규슈>에서 하급무사 출신으로 태어나 명치유신에 참여, 자유민권 운동가로 정계에 투신, 헌정당의 당수로 두 번에 걸쳐 수상을 지낸 입지전적인 거물이었다. <학문의 독립>을 부르짖고 진리 탐구를 위한 학자의 자유와 정부 권력으로부터의 학문 독립이란 기치 아래 <와세다>대학을 창설하여 일본 사학의 대표적인 위치에까지 키워 놓은 인물이었다. 仁村은 정치가로서 보다는 교육가로서의 <오오꾸마>, 그의 웅대한 포부와 열렬한 추진력에 커다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고, 그의 힘으로 배출시킨 <와세다>의 인재들이 새로운 일본을 건설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는 것에 감명을 받았던 것이다.
젊은 仁村은 바로 그와 같은 교육가가 되 보고 싶다는 웅지를 품게 된 것이었다.
1914년 7월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仁村은 만 6년간의 일본 유학을 마치고 큰 포부를 안고 귀국하게 되었다. 그의 나이 스물 네살이었다. 古下 송진우는 졸업시험을 앞두고 병명을 알 수 없는 고열에 시달리다가 먼저 귀국하여 요양 중이었기 때문에 仁村의 귀국은 혼자였다. 고향에 돌아오니 장남 상만은 다섯 살이 되어 있었다. 그동안 본댁에서는 조부님과 조모님이 손자의 졸업을 보지 못하고 별세한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