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화

중앙학교와 독방의 단식

인촌이 인수할 무렵의 중앙학교 인촌이 인수할 무렵의 중앙학교

인촌은 자신의 힘으로 <백산학교>를 세우려 했으나 결국 깊은 좌절감을 맛 봐야했다. 여러 경영난에 시달리던 여러 사립학교에서는 서로 자기네 학교에 출자를 하고 인수해 달라고 청해 왔다. 그러나 인촌은 초지를 굽힐 수가 없었다. 그 즈음 대표적인 민간 사립학교의 하나인 중앙학교를 인수해 달라는 교섭이 왔다. 중앙학교는 한 개인이 아니고 중앙학회라는 기관에서 세운 사립학교였다. 중앙학교 인수 제의를 받은 仁村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

仁村은 사립학교 설립인가가 벽에 부딪치자 실의에 빠져 있다가 그 제의를 받고 비로소 여러 모로 검토를 하게 되었다. 학회의 통합과정, 그리고 학교의 설립과 그 동안의 운영실태 등 면밀하게 조사를 해보고 난 仁村은 중앙학교가 왜 고사지경에 이르렀는지 그 이유를 찾아냈다.
한 마디로 중앙학교는 사공이 너무 많아 바다로 가지 못하고 산으로 올라가 있다는 것이었다. 운영난의 근본 원인은 학교의 주인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중앙학교는 여러 학회가 통합하여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학회들이 학교운영에 서로 간여하고 간섭하여 경영이 부실해진 것이다. 따라서 중앙학교를 살리려면 다원적이 아닌 일원적으로 일관된 운영을 해야만 한다고 느꼈던 것이다.

마침내 仁村은 중간에서 중앙학교 인수제의를 해 온 사람과 대좌하자 중앙학교의 무조건 완전인계를 요구했다. 조건없이 학교전체와 모든 운영권을 인계해 준다면 인수를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중앙학회의 원로인사들은 처음부터 학회는 그대로 존속하고 仁村은 출자자로 학회에 들어와 학교의 운영만을 맡아야 한다는 조건을 붙이고 있었던 것인데, 仁村은 학회와는 관계없이 <중앙학교>만을 인수해서 경영해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요. 학회는 해산하든 말든 알 바 아니고 학교만 인수해서 살려 보겠다는 말 아니오? 학회없는 학교가 어딨단 말이오?"
학회를 더 소중하게 아는 원로들의 자존심이나 체면으로 보아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중앙학교는 존폐의 기로에 서 있었다. 학회에서는 자존심을 떠나서 한 번 더 仁村에게 간곡히 학회와 학교를 위해 자기들이 처음 내세운 조건에 도의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仁村은 단호한 태도를 취했다.
"제가 관심을 갖는 것은 중앙학회가 아니라 중앙학교입니다. 학회와 학교를 다같이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 만한 자신이 없으니 학교의 무조건 완전인계라는 제 주장이 관철되지 않는다면 손을 뗄 수 밖에 없습니다."

仁村은 포기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당황한 학회의 원로들은 구수회의를 거듭한 끝에 그동안 몇 차례 만나 본 仁村의 사람됨이 성실하고 교육에 대한 포부나 그 열정이 범상치 않다는 것 간파하고 마침내 중앙학교의 무조건 완전 인계를 결정했다. 팔도의 뜻을 모아 세운 것이나 다름 없는 대표적인 사립학교인 중앙학교를 내놓는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는 학회 원로들의 심정은 이해하면서도 학교를 살리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는 수 밖에 없다고 仁村은 판단했던 것이다. 그들의 요구대로 현재의 상태를 그냥 놔두고 출자자가 되어 중앙학교를 맡는다 해도 사공이 많은 운영체제를 가지고는 전임자들이나 마찬가지로 깨진 독에 물 붓기 일뿐 출자의 의미를 찾을 수 없이 다시 경영난에 봉착할 것은 뻔해 보였던 것이다. 어쨌든 당시의 학회회장 김윤식을 비롯 이상재. 유근. 유진태 등 원로들은 仁村이 요구한 대로 조건 없이 학교를 내놓는다는 데에 동의했던 것이다.

비로소 仁村은 뜻을 이루고 벅찬 흥분을 느꼈다. 가슴 속에 품어 왔던 교육구국의 웅지를 펴게 되었다. 仁村을 더욱 감격케 한 것은 민족의 대표적인 원로 지도자들이 등을 두드려 주며 仁村을 믿고 학교를 내주었으며 협조를 아끼지 않겠다는 다짐을 해준 것이었다.

그러나 그 흥분도 잠깐이었고 학교를 인수하려면 엄청난 거금이 필요한데 그 돈을 마련해 줄 어른들을 설득할 일이 아득하기만 했다. 언젠가 졸업을 앞에 두고 두 부친이 동경 나들이를 왔을 때 仁村은 교육사업에 장차 몸바쳐 보겠다고 말씀 드렸다가 지산공에게 꾸지람만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줄포 집으로 내려오는 仁村은 내내 근심에 쌓여 있었다. 물론 절망만 할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원파공만은 그때도 仁村의 장래 희망에 대해 이해를 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집에 돌아온 仁村은 두 부친을 뵙고 중앙학교를 인수하게 됐다는 경위를 자세히 설명 드리고 출자를 해 주십사 하고 청했다. 자초지종 모든 내용을 다 듣고난 두 어른은 놀라는 표정이 되었다. 특히 원파공은 아들이 몇 달 사이에 그렇게 큰 일을 이룩하고 왔다는 사실에 몹시 대견해 하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중앙학회라면 이들도 무관한 사이는 아니었던 것이다. 통합 전에 있었던 호남학회는 仁村의 장인인 고정주공과 지산공도 발기인으로 돼 있는 학회였던 것이다.

게다가 중앙학회는 모든 학회를 망라한 모임인 데다가 그 곳에서 경영하는 중앙학교야 말로 팔도의 뜻을 다 모아 만든 교육기관인데 아들이 그 학교를 인수하기로 했다고 하니 대견하고 자랑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 참 자랑스럽구나. 대저 너같이 어린 아이, 뭘 보고 그 어른들이 그런 대사를 맡겼는지 모르겠다? 널 아주 잘 보았던 모양이로구나?"

원파공이 그렇게 말하자 지산공은 별로 기뻐하는 빛도 보이지 않고 한 마디 했다.

"형님도 참, 아들하고 똑 같으십니다. 잘 되면 왜 학교를 넘기려합니까? 중앙학회, 학회하지만 지금은 속 빈 강정이고 이름 뿐입니다. 학교도 이름만 남았을 뿐 문 닫기 전일 것입니다. 그래서 작자를 구하는데 마침 부자집 아들이 걸려든 거지요. 사람을 보고 학교를 넘기려는게 아니고 돈을 보고 넘기려는 겁니다."

"무슨 소릴 그렇게 하느냐? 그래 김윤식이다, 이상재다, 장지연이다 하는 그런 거물들이 할 일 없어 이 아이 붙들고 학교 해 보라고 했겠느냐? 그분들이야 말로 존경 받는 사람들인데 허튼 생각으로 대했겠느냐 말이야"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뭔가 곡절이 있는겁니다."

처음부터 두 부친의 의견은 서로 갈리게 되었다. 仁村은 우선 부친에게 간청했다. 원파공은 아들이 설명하는 앞으로의 계획과 포부를 들으면서 아들의 큰 뜻은 결코 굽혀지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느끼고 차츰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틀이 지난 저녁, 원파공은 조용히 아들을 사랑으로 불렀다.

"아버님 부르셨습니까?"

"음"

장죽을 물고 묵묵히 담배를 피우던 부친이 문득 말을 이었다.

"정말 해 볼 생각이냐?"

"예"

"그렇다면 됐다."

"예?"

"결심을 했다. 네 뜻이 바로 내 뜻이다. 내 대신 구국교육의 그 대사를 맡아서 혀봐."

"아버님"

"그르침이 없도록 명심혀라"

"아버님 고맙습니다."

仁村은 감격하여 무릎을 꿇은 채 눈물을 흘렸다. 원파공은 仁村의 학교사업을 위해 3천두락의 땅을 내놓았던 것이다. 3천두락의 땅이야 말로 원파공에게는 전 재산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 토지만으로는 학교를 인수해서 운영해 나갈 확고한 토대를 이뤄 놓기에는 부족했고 따라서 지산공의 협조가 꼭 있어야만 했다.

"뭐? 형님이 그 철부지 아이 말만 믿고 3천두락의 땅을 내놓았다고? 허허 이런 변이 있나?" 지산공은 놀래어 사랑으로 원파공을 찾아갔다.
"형님 지금 정신이 있으십니까 없으십니까? 철부지 아이 말만 믿고 전 재산을 내놓으시다니요? 나라에서도 경영 못하는 학교입니다. 형님 말씀처럼 민족의 지도급 유지들이 모인 중앙학회에서도 유지를 못하고 망한 학교입니다. 그런 학교를 세상도 모르는 아이가 어떻게 경영할 수 있단 말입니까? 안됩니다. 형님"

"아우, 성수를 어린애로 보면 안돼. 뜻을 가진 대장부야. 난 학교를 해 봐서 사정을 좀 알지. 우리 성수는 해낼 수 있어. 전 재산 다 날리고 내가 골목에 나앉는다 해도 후회 않겠어. 그 3천두락가지고는 모자란다고 허는데 아우도 생각을 고쳐먹고 도와주라고!"
원파공은 뜻밖에도 仁村을 확고하게 밀어주며 아우에게 출자를 하라고 권하는 것이었다.

"그럴수는 없습니다. 이번 일에는 필유곡절이 있습니다. 시절도 하수상한데 누굴 믿을 수 있습니까? 학회의 명사라는 사람들도 믿을 수 없고 거기엔 분명 누군가 중간에서 농간을 부리고 있는 겁니다. 성수가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자세히 알지도 못하고 재산을 길거리에 내놓으시다니 그건 말도 되지 않습니다."
지산공은 완강하게 반대했다. 그게 아니라고 仁村이 애원을 하고 옆에서 원파공이 설득을 해도 요지부동이었다. 仁村은 급히 서찰 한 통을 써서 머슴에게 준 다음 서울에 올라가 중앙학회의 김윤식 회장을 찾아가게 했다.

仁村의 서찰을 받은 학회에서는 깜짝 놀랐지만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양부는 승락을 했지만 생부는 의심을 하고 승낙을 하지 않으니 학회에서 도와달라고 仁村은 편지에 썼던 것이다. 학회에서는 중앙학교의 학감을 지낸 이항직을 머슴을 따라 줄포로 내려 보냈다.
仁村의 집에 온 이항직은 중앙학회를 대신하여 이번 일의 경과를 소상하게 설명했다.

"지산공도 잘 아시겠지만 중앙학교는 전국 유일의 민족사학입니다. 하지만 일제의 억압과 경영의 부실로 인하여 학교 자체가 존폐의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뜻 있는 이들은 어떡하든 학교를 살려야 한다며 안타까와 하고 있습니다. 처음 자제분께서 맡아 보겠다고 했을 때 모두 반신반의 했습니다마는 누차 자제를 격어 본 분들이 그만하면 맡아서 경영 할 만한 큰 그릇의 인물이라 여겨 인계를 결정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결코 어떤 협잡배의 농간이 있거나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지산공은 협잡배의 농간이 있었던 건 아니라고 믿게 되었지만 연소배인 아들의 경거망동이라는 것만은 틀림 없다며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 이항직도 별 수 없이 돌아가고 말았다.

仁村은 생가의 부친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아버님, 도와주십시요, 장부일언은 중천금이라 했습니다. 학회의 어르신네들과의 천금 같은 약조입니다. 그 약조를 어기고 그분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

"너의 약조이지 내가 한 약조는 아니다"

"아버님 아들이 약조를 하면 아버님도 약조를 하신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약조를 위배하여 망신하게 되면 어찌 저 뿐입니까? 아버님은 물론 김씨 가문까지 망신을 하는 거 아닙니까?"

"이놈 듣자 듣자하니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어른들께 상론 한 마디 없이 일을 저지르고 뭐이가 어째?"

"아버님 약조를 지키지 못한다면 소자는 아버님 눈 앞에서 없어 지겠습니다."

"뭐라고?"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습니다. 만주 길림성으로 가거나 아니면 상해로 가서 독립운동에나 몸바칠까 합니다."

비장한 결심을 한 仁村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래도 지산공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仁村은 아버지 사랑에서 물러나오자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고리를 안으로 걸어 잠갔다. 그런 다음 식음을 전폐했다.

"뭐라구? 곡기를 끊고 완장을 하고 있다고?"
부인으로부터 아들이 단식을 시작했다는 말을 듣자 깜짝 놀랐다.

"약조를 지키지 못하고 뜻한 것을 이룰 수 없다면 차라리 죽는게 낫다며 저러지 뭐요?"

"죽는다고? 죽어보라고 해요!"

지산공은 역정을 냈다. 아들은 점심을 굶더니 저녁까지 굶는 것이었다. 하룻밤을 새고 나면 배가 고파 문을 열고 나오려니 했지만 아들은 이튿날 아침까지도 방문을 열지 않았다. 식구들은 애가 타서 제발 문을 열라고 애원했지만 仁村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시 아침 점심 저녁을 내리 굶는 것이었다. 같은 울 안에 살고 있는 원파공은 아우를 나무랐다. 귀중한 장손, 저러다 정말 일을 당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는 것이었다.

지산공에게도 仁村은 정말 귀중한 아들이었다. 이틀 동안 굶고 버티는 것을 보니 밖으로는 근엄한 척 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안타깝고 안쓰럽기 이를 데 없었다.
(저 놈이 저 정도라면 그 결심은 대단한 것이로구나! 내가 지금까지 너무 어린아이 대접을 한 것은 아닐까? 이제는 한 사람 대장부의 몫을 할 만큼 성장했구나!)

한편 생각해 보니 아들이 기특하기 조차 했다. 다른 부자집 아들들은 주색잡기에 팔려서 가산을 탕진하여 부모 속을 썩히는 일이 많다는데 교육사업을 하겠다고 저런 비장함을 보이는데 끝까지 반대만은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마침내 지산공은 아들의 방 앞으로 갔다.

"성수야 그만하면 됐다. 방문을 열어라. 너 하고 싶은 대로 하여라"

지산공도 드디어 아들의 결심에 승복하고 말았다. 그는 아들의 교육사업을 전적으로 도와 주겠다고 약조를 했던 것이다. 仁村을 뛸 듯이 기뻐했다. 이때 원파공은 仁村에게 학교경영은 항상 집안 어른들과 사전에 상의해서 처리하도록 당부를 잊지 않았다.
당시 仁村이 문고리를 안으로 잠그고 단식을 한 줄포 집의 안사랑은 지금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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