主旨(주지)를 선명하노라
1920년 4월1일. 민족의 정론지 동아일보는 고고의 성을 내며 화동 138번지 중앙학교의 구교사에서 태어나 동포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게 되었다.
1. 조선민중의 표현기관으로 자임하노라.
2. 민주주의를 지지하노라.
3. 문화주의를 제창하노라.
이상과 같은 3대주지를 표방한 동아일보는 타블로이드 배대판인 전지판 8면의 창간호로 민족의 마음 위에 출항을 시작했다. 창간호에는 동아일보의 정신을 담은 대문장인 장덕수의 창간사가 실려 아직까지도 당대 최고의 명문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창천에 태양이 빛나고 대지에 청풍이 불도다. 산정수류하며 초목창무하며 백화난발하며 연비어약하니 만물 사이에 생명과 광영이 충만하도다.
동방 아세아 무궁화 동산 속에 2천만 조선민중은 일대 광명을 견하도다. 공기를 호흡하도다. 아, 실로 살아있도다. 부활하도다. 장차 혼신용력을 분발하여 멀고 큰 도정을 건행코자 하니 그 이름이 무엇이뇨 자유의 발달이로다.
기상이 넘치고 과감하며 뜻이 깊어 이 창간사를 읽는 독자들은 새로운 독립선언서를 보는 것 같아서 감격해 마지 않았다. 창간호를 내놓고 仁村을 비롯해 동아의 가족들 또한 같은 감격을 맛 보았다.
모든 동포들이 동아일보의 창간에 환호를 하는 만큼 그 시련과 탄압의 함정은 항상 위협을 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총독부 경무국 고등경찰과의 검열 당국자들은 걸핏하면 철퇴를 휘둘러 <삭제><발행반포 금지><게재중지><무기정간> 등으로 마음대로 탄압했다. 동아일보가 창간 6개월 동안 삭제 4건, 발매반포금지가 12건, 압수 및 발매금지가 2건, 게재중지 1건 등 도합 19건으로 평균 9일에 한 번씩 당한 걸 보면 얼마나 치열한 저항정신을 보였는지 알 수가 있다. 이 당시 종합지 <개벽>에 실린 글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이때 총독부 당국자는 어떤 기회에 각 신문 관계자들을 불러놓고 훈시겸 책망겸 말하기를 동아일보는 배일신문, 조선일보는 미치광이 신문, 시사신문은 안 보는 신문으로 되어 있으니 "조선에는 정작 신문다운 신문은 하나도 없지 않느냐"고 해서 한때 신문계의 한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동아일보는 <동아>자체 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도 민중의 대표신문으로 인정하는 동시, 그 논조와 일반기사의 취급하는 태도가 자못 강직 악려하여 가끔 압수, 정간의 처분을 당하고, <조선>은 대정 친목회의 기관지로 최초에는 실업신문을 표방하였으나 당시 민중의 사상 영합과 <동아>와의 판매 경쟁책으로 그 최초 취지에 위반되는 논조와 기사를 취급하다가 가끔 또 압수 정간의 처분을 당하고, 시사신문은 민원식 일파의 국민협회 기관지인 만큼 그 주의 선전에는 충실하였으나 당시 일반민중이 잘 보지를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