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맞춤법과 仁村
일제는 한반도를 식민지화 하고 나서 원료 공급지로 만들어 경제 침탈을 가속화하는 일방 이른바 <황국사관>이란 식민지사관을 만들어 역사까지 날조, 왜곡하여 한국인의 의식구조에 열등의식을 심으려고 광분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알면 알수록 仁村은 어떻게 하더라도 민족정기를 지키고 발흥시켜야만 광복후의 국학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는 사명감을 갖게 되었다.
당시 민족 지도자 중에 그 같은 일에 관심을 가지고 심혈을 기울인 사람은 흔치 않았다는 데서 仁村의 위대한 민족애와 선견지명을 볼 수 있다. 仁村은 민족사의 올바른 연구를 위해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민족의 언어인 한글표기의 통일을 절감하고 통일안 연구에도 후원을 하고 <동아일보>를 통하여 스스로 맞춤법 통일안을 실천 보급하는데 앞장 섰다.
한글맞춤법 통일안의 제정은 아주 시급한 문제였다. 나는 당시 25세의 약관으로 권덕규. 김윤경. 최현배씨 등 선배들을 모시고 18인 소위원회 위원으로 125회의 모임을 갖는 동안 모든 궂은 일을 도맡아 했다. 심지어 화계사 회의 때는 모든 경비까지 조달해야 할 정도였다. 경비 150원은 거금이었는데 선친께서 구해다 주셨다. 仁村 선생의 후원이 아니었나 싶다.
어쨌든 통일안은 우여곡절 끝에 제정되었으나 시행이 문제였다. 모든 신문. 잡지. 출판물이 호응을 해 줘야 하는데 호응을 하자면 활자를 다시 주조해야 하기 때문에 막대한 비용이 들게 돼 있었다. 제정만 해 놓고 시행을 못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조선어학회>에서는 날더러 <동아일보>를 설득하도록 책임을 맡겼다. 선친이 계시기 때문에 그랬을 텐데 어쨌든 나는 어려운 책임을 완수했다. 仁村 선생과 古下 선생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동아일보가 10만부를 찍어 전국에 홍보를 하고 앞장 서서 새 맞춤법을 시행해 주었다.
한글이 오늘날의 체계를 잡은 것은 동아일보의 공로인 동시에 仁村의 공로인 것이다. 당시 동아일보는 1만부가 나갈 때였다. 나는 동아일보에 파견되어 맞춤법 교열하는 일을 맡기도 했다.
1942년, 언어말살을 기도한 일제의 흉계에 의해 이른바 <조선어학회>사건이 일어나 나도 가람 이병기와 연행되어 옥고를 치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仁村 선생도 고역을 당하시고 겨우 투옥만은 면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옥고를 치르고 나와 仁村을 뵈러 갔더니 내 손을 잡으며 고생했다 하시고, 고문을 당하면 못할 말이 어디있겠나 하시며 이극로를 걱정했다. 무슨 일이 있었구나 직감한 내가 물었더니 혼자만 알고 있으라며 말씀했다. 잡혀간 이극로가 매에 못이겨 사전 편찬 등은 독립운동의 일환이라고 거짓 자백을 했으며 <조선기념도서출판관>의 책임자로 있던 仁村도 관련이 있는 것처럼 말했다는 것이다. 그렇잖아도 틈만 엿보던 경찰은 仁村을 옭아 넣으려 했다.
"어느 날 보안과장 <야기>라는 자가 날 청향원(술집)으로 부르더구먼? 술 한 잔 사겠다는 거여. 무슨 꿍꿍이가 있지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이건 취조여. 조선어사전 편찬은 독립운동의 방법이었다고 이극로가 불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거였지?"
"그래서요? 뭐라셨습니까?"
"조선어 사전 하나 편찬해서 독립이 된다면 왜 진작 편찬하지 인제야 하느냐! 일본 경찰이 그렇게 편협한 줄 몰랐다. 독립운동과 사전 편찬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했지.
"그랬더니 뭐래요?"
"말이 막히는 지 더 말이 없더구먼!"
그 뒤에도 감시의 눈을 번뜩이며 仁村 선생을 계속 괴롭혔다고 한다. 그러나 그 말씀은 결코 다시는 입밖에 내지 않았다. 범인(凡人)으로서는 못할 일이다.
(金善琪)
한글맞춤법 통일안의 필요성을 느끼고 당시의 한글학자 권덕규. 김윤경. 박현식. 신명균. 이극로. 이병기. 이윤재. 이희승. 장지영. 정열모. 최현배. 정인섭 등 조선어학연구회 회원들이 통일된 맞춤법을 만들자고 결의한 것은 1930년 12월 중순이었다. 그들은 3년 동안의 연구끝에 1933년 10월29일 최종안을 내놓았다. 그 연구가 중단되지 않고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은 仁村의 관심과 재정적인 뒷받침 때문이었다고 이희승은 술회하고 있다.
仁村 선생은 조선어학회와 직접적인 관계는 맺고 계시지 않았지만 기회 있는 대로 음으로 양으로 원조를 아끼지 않으셨다. 단번에 많은 금액을 내주신 일은 없으나 일이 있을 때마다 가서 청하면 거절하시는 일이 없으셨다. 이극로가 간사장으로 학회 일을 맡았을 때도 그랬고, 내가 간사장이었을 때도 그랬다. 지금 기억에 남는 것으로 표준어 사정위원회를 우이동 봉황각에서 열었을 때 仁村 선생은 당시로서는 상당한 거액이었던 3백원을 쾌척하셨고, 철자법 위원회는 제1회 개성, 제2회 인천, 제3회 서울 화계사에서 열었을 때도 그때마다 적지 않은 액수의 돈을 내주셨던 것으로 안다.
이러한 仁村을 古下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다른 사업도 급한데 그거 천천히 하면 안돼?"
"그것보다 시급한 일은 없네"
"무슨 말이여?"
"우리 민족에게 말과 글이 있다는 게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자네 모르지? 일본 사람들 보게, 말은 있어도 고유한 문자는 없네. 서양 사람들도 말은 있지만 고유한 문자가 있는 나라는 별로 없지. 알파벳을 모두 사용하지. 허지만 우리에게는 고유한 문자가 있네. 내가 영국에 갔을 때지. 내가 신문을 하고 있다니가 한다하는 지식인들이 내게 묻더구먼. 조선은 중국어를 쓰느냐, 아니면 일본어를 쓰느냐. 문자는 어느 나라 걸 쓰느냐? 그렇게 묻더구먼?"
"무식한 친구들!"
"당연하지. 그 사람들이 어떻게 알겠는가? 그래 가방 속에서 우리 동아일보를 꺼내 보여 주었지. 이것이 우리나라 문자이고 고유한 말이다. 그랬더니 모두 뒤로 자빠지는 거야. 고유한 말과 문자를 가진 나라는 지구상에 몇 안 되는데 그렇게 유구한 문화국인 줄 몰랐다고 말여"
"맞어. 놀라왔겠지?"
"그런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직까지 표기법 하나 통일이 안 되었다는 건 부끄러운 일 아닌가? 그래서는 안 되네. 우리 신문이 통일된 표기법을 사용하고 계몽해야 하네"
"뜻은 알겠네만 어려운 일이지. 새 맞춤법으로 우리가 맨 먼저 표기를 한다고 해서 다른 신문 잡지가 호응할까? 그게 두렵군. 게다가 새 철자법을 사용하자면 새 활자를 주조해야 한단 말여. 그 돈도 막대할 텐데?"
"돈 걱정은 말게. 민족 백년대계를 위해서 하는 일인데 돈 아까와 할 필요 뭐 있는가? 공무국에 알아 봤더니 7만원이면 새 활자로 바꿀 수 있다더구먼? 우리가 솔선수범하는 거여"
그것이 모험인 줄 알면서 이른바 민족문화의 백년대계를 위해서 仁村은 과감하게 밀고 나갔다. 드디어 동아일보가 새 맞춤법 통일안에 따라 새 철자법으로 신문을 제작하자 경향 각지의 모든 신문과 잡지가 뒤를 이어 채택함으로써 仁村의 뜻은 결실을 보게 되었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요구하고 언어까지 말살하려 들 때 우리 문자의 재정비로 맞선 仁村의 기개는 높이 살 만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