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의(民意) 부통령
이시영 부통령의 사표가 수리되자 곧바로 공석 중인 부통령 자리를 메꿔야만 했다. 며칠 후 진해로 仁村을 찾아온 민국당의 간부들은 仁村에게 부통령에 출마하도록 권했다.
"날 더러 만인이 욕하고 있는 그런 돼먹지 못한 집안으로 시집을 가라고? 아예 그런 소리 마시요. 날 욕되게 하지들 마시오"
仁村은 펄쩍 뛰었다. 그러나 그의 동지들은 본인의 동의도 없이 仁村을 부통령후보로 내세워 당선을 시켰다.
그때는 국회에서 의원들이 대통령과 부통령을 선출하는 제도였다. 1951년5월16일이었다. 진해 경찰서장으로부터 그 소식을 들은 仁村은 대경실색하고 뒤이어 몰려 온 기자들에게
"적임자가 아니므로 부통령에 취임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궁지에 몰린 것은 그를 추천한 민국당의 간부들이었다. 김준연. 나용균. 신각휴 등이 내려와 仁村을 설득했다. 그러나 거절이었다. 실권 없는 부통령 자리에 들어가 이승만과 함께 매도 당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잃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간부들의 설득은 끈질겼다.
"선생님이 지금 원내사정을 모르셔서 그러시는 겁니다. 도적이 들어 왔는데 숨으셔야만 합니까? 한 집안 식구라면 작은 힘들이라도 합쳐서 쫓아야지요? 이박사는 자기 노선과 같은 사람이거나 자기 심복이 부통령으로 들어 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박사가 바라는 사람이 부통령이 되면 이나라는 어찌 될까요? 망합니다. 제2, 제3의 거창사건, 방위군 사건이 꼬리를 물 것입니다. 선생님이 나서시어 제동을 걸어야 나라가 살아 납니다"
김준연의 열띤 설득이었다. 평소 영국 신사라고 仁村이 좋아하던 나용균까지도 진지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거절하시면 국회에서는 재선거를 하게 되고 재선거를 하면 무법이 판을 치는 혼란이 와서 수습을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부통령 당선은 민의에 의해서 되신 겁니다. 선생이 아니면 부통령으로 이박사를 견제할 사람이 없다고 해서 뽑히신 겁니다. 이건 민의(民意)입니다. 민의를 외면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완강하던 仁村도 <국민의 의사>라는 말에는 꺽이고 말았다. 마침내 仁村은 승낙하고 1951년 5월18일 정오, 국회 본회의에 나가서 취임인사를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