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노선의 정치사적 의의
첫 번째 시기는 1891년에 태어나서 1914년 일본유학을 마칠 때까지의 24년간이다. 이 시기에 그는 조선왕국-대한제국의 신민으로서, 기울어가는 국운의 장래를 놓고 깊은 고뇌와 번민을 경험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실력배양론적-준비론적 노선의 독립운동을 입지한다.
두 번째 시기는 일본유학을 마치고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기까지의 5년간이다. 이 시기에 그는 20대 청년으로서 중앙학교를 인수하고 경성방직회사를 설립함으로써 민족교육과 민족산업의 첫걸음을 내딛고, 송진우 현상윤 등과 함께 3·1운동을 배후에서 지도한다.
세 번째 시기는 1920년 <동아일보>의 창간으로 민족언론을 창달하고, 중앙학원의 설립 및 보성전문학교의 인수로 민족교육에 매진하다가 1945년 일제의 패망과 민족의 광복을 보았던 때까지의 25년간이다이 시기에 그는 합법적 우파민족운동가로서 교육·산업·언론을 통한 소위 '삼전'의 구국활동을 전개한다. 운동의 흐름으로 볼 때 세 번째 시기는 두 번째 시기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네 번째 시기는 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으나 미국과 소련에 의해 국토가 분할점령된 가운데 독립국가의 건설이 준비되던, 이른바 해방정국의 시기이다. 미군정치하의 남한에서 소련과 공산주의에 반대하고 미국과 우익을 지지하는 노선에 서서 한민당을 이끌면서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돕던 시기이다.
다섯 번째 시기는 정부수립 이후 이승만의 권력독점과 독재가 노골화되자 민주국민당을 결성하여 반독재투쟁을 전개하다가 1955년 타계하기까지의 8년간이다. 이 시기에 그는 부통령을 역임하는 등 정치일선에 나서서 반독재투쟁을 선도하기도 했지만, <동아일보>의 중간과 고려대학교의 설립 등 실력배양노선의 연장으로서 민족의 자립자강을 위한 초석을 다지는 일에도 열과 성을 쏟는다.
그러한 면에서 인촌은 무엇보다도 실천가였다. 일제치하에서 그는 실력배양론적-준비론적 노선에서 독립운동을 구체적으로 실천해 간 자랑스런 저항민족주의자의 삶을 살았으며, 외우내충의 격동기에서 민족의 자주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온갖 정성과 노력을 기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촌의 정치적 이미지가 '보수'라는 부정적개념에 갇혀 있는 주된 이유는 아마도 변진흥의 지적처럼, 우리나라 정치가 "건전한 보수정치의 맥을 이어오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인촌의 대변이던 고하가 피살된 후 상황의 압력에 못 이겨 정치일선에 나서긴 했지만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첨예하게 충돌했던 해방정국의 무대에서 그의 운신 폭은 지극히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건국초기의 우익 보수정치는 이승만의 권력욕에 부닥쳐 결국 권력투쟁의 차원으로 변질되었고, 5·16이후 독재와 민주의 대립구도 보수와 혁신의 이데올로기적 대립구도로 손쉽게 이전됨으로써 '진정한 보수'의 개념은 설자리를 잃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인촌이 닦기 시작한 터가 넓어지면서 그 위에 대한민국이 섰다는 사실이다. 인촌이 창당한 한국민주당은 국내적 정치기반이 약하던 이승만을 도와 대한민국의 수립에 크게 이바지했거니와 한국정치사상 최초의 근대적인 야당으로 출범한 민주국민당은 인촌의 지도 아래 반독재투쟁의 전통을 확립했다. 거기서부터 정통야당의 맥을 이어나간 제2공화정의 민주당과 신민당, 제3공화정의 민정당과 신민당, 제4공화정의 신민당, 제5공화정의 민주한국당과 신한민주당과 통일민주당 등등은 이 나라 민주화운동에 기관차역할을 했던 것이다.
'평전 인촌 김성수'(1991. 동아일보사)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