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인촌의 민족교육활동
인촌은 1945년 8·15 해방 직후 교육사업에만 전심전력하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1945년12월30일 우파의 대표적인 정당인 한국민주당 수석총무(당수) 송진우가 암살당한 사건이 일어나고 뒤이어 1946년1월7일 인촌이 한국민주당 수석총무로 선출됨으로써, 그는 해방 직후의 복잡한 정치에 휩쓸려 들어가게 되었다. 그 이후 우파 정치인으로서의 인촌은 좌파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받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좌파까지도 비판하지 않고 높이 평가한 그의 사업이 있으니, 그것이 일제하의 인촌의 민족교육사업인 것이다.
해방 직후 여운형 등과 좌파는 좌·우연합의 임시민족정권을 표방한 「인민공화국」의 내각 명단을 발표한 적이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주석에 이승만, 부주석에 여운형, 국무총리에 허헌, 내무부장에 김구, 외무부장에 김규식, 교육부장에 김성수, 재무부장에 조만식, 군사부장에 김원봉, 농림부장에 강기덕, 사법부장에 김병로 등이었다. 해방직후 우파는 물론이요 좌파도 일제하의 인촌의 민족교육활동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교육부장>으로 영입하려 한 것이었다. 일제치하 때부터 인촌과 동일한 시기에 연희전문학교 교장직을 맡아서 민족교육활동에 헌신해 왔던 백낙준은 교육가로서의 인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인촌 선생은 어떤 분이시냐 하면 백년대계를 위하여 민족의 밑 힘을 길러주신 큰 교육가입니다. 〔…〕민립대학 운동이 일어날 때에 국민들 가운데는 호응한 사람이 많았으나 일본 사람들이 위에서 그것을 반대하였고, 또 그것이 성공하려면 시일이 꽤 걸리고 동시에 용두사미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인촌 선생은 목격하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을 모아 민립대학을 이룩하기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깨달으시고 자기의 가진 바 온 재산을 바쳐 민립대학의 기초를 세운 것이 고려대학교인 것입니다."
또한 일제치하부터 해방 후까지 좌익운동에 헌신해왔던 김종범은 해방 직후 그의 저서 『해방 전후의 조선사정』이라는 책에서 한국민주당을 「부르주아적 반동단체 내지 친일지주당」이라고 격렬히 비판 공격하면서도 인촌에 대해서는 이례적으로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김성수씨가 공익사업 문화사업 구제사업에 금전을 희사하되 사생활에는 절약한다는 것인데, 일례를 들면 고향에 내려갈 때에 정읍역에서 하차하여 줄포 자택까지는 약20킬로미터나 되어, 역전에 대절 차가 있을 때에는 요금이 5원으로 그 지방의 중산 이상 인사는 누구나 대게 이것을 이용하는데도 동씨는 어느 때든지 도보로 내왕하여 일반인사를 경복케 하였다.
동경 재학시대에 자기가 학비를 당하여 주던 학생과 의견 충돌로 서로 말을 하지 아니하는 일이 생겨도 그 학비만은 기일이면 틀림없이 보내 주었다. 〔…〕씨에 관한 일화와 민담이 허다하다는데 필자 과문하여 이로써 약하려니와, 자본가를 반동세력 운운하고 반대하는 공산당의 기관인 인민공화국에 씨가 문교부장으로 추천된 일례만 보아도 씨의 기인을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며, 씨의 덕망과 인격에 대하여는 누구나 칭찬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씨는 어느 시기에 가면 일본의 아리시마와 같이 재산포기를 솔선 실행할 1인이라 하며, 그 철저한 배일사상과 애국심등 여러 가지 각도로 보아서 실로 조선의 모범적 인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일제하 인촌의 교육·언론·실업에 걸친 여러 분야의 업적 중에서도 교육 부문에서 이룩한 업적이 중심적인 위치에 있는 것이며, 해방 후까지도 초당파적으로 높이 평가받고 칭송받은 업적이라고 볼 수 있다.
'평전 인촌 김성수'(1991. 동아일보사)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