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피한 선택 - 정치지도자의 길: 인촌의 정치활동
이는 제헌국회의원 이상돈이 정치가로서의 인촌을 회고한 글의 첫머리에 나오는 내용이다. 화려하고도 빛나는 정치적 경력이 두드러지게 눈에 띄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인촌을 위대한 정치가로 보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가 남긴 업적은 무엇인가.
인촌이 정치활동에 전면적으로 나선 것은 그의 전체 생애 중 55세 이후 해방이 되면서부터 세상을 떠나기 전 까지의 10여년 동안이다. 이 짧은 기간 중에서도 인촌이 정치인으로서 공식적인 활동을 한 것은 고하 송진우의 피살이후 한민당 당수를 맡은 것과 제1공화국에서 부통령을 역임한 것이 전부이다. 그러므로 표면적인 것만 보면 인촌의 정치활동은 눈에 두드러질 만한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인촌은 앞에 나서지 않았을 뿐 해방정국으로부터 민주당이 창당되기 몇 개월 전까지 한국현대정치사를 이끌어간 소수의 정치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서 한국을 독립된 민주국가로 건설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그가 정치적으로 앞에 나서지 않았던 것은 그의 비문에도 적혀있듯이 언제나 적재를 앞세워 적소에 나가도록 하고 자신은 겸허와 성실로 후견함을 낙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해방 후 전개된 인촌의 정치활동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라는 두 이념적 축을 줌심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는데 해방으로부터 정부수립까지는 민족자주독립을 성취하기 위한 정치활동이었으며 정부수립후로부터 그가 세상을 떠나기까지는 반독재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정치활동이었다.
해방 후 실시된 미군정 기간 동안 인촌은 한민당 당수로서 군정종식을 위해 헌신하였으며 열강의 신탁통치 계획과 점점 구체화되어가는 미소의 냉전구도 그리고 좌우익의 이데올로기적 갈등 속에서 그는 민족통일과 자주독립국가 실현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국제형분단과 내쟁형분단의 복합작용 속에서 남한에 단독정부가 들어서 독재로 나아갈 때 인촌은 범야민주세력을 결집하여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전개하였다. 적어도 오늘날까지 권위주의 정치에 대항하여 온 한국의 민주주의 운동과 정통야당의 저항이 그 뿌리를 제1공화국의 민주당에서 찾는다면 인촌은 바로 그 민주주의 운동의 근원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촌의 정치활동은 대체로 네 시기로 나눠 고찰될 수 있다. 즉, 해방정국 초기에는 주로 고하와 함께 또는 그 뒤에서 임정봉대론의 기치 아래 국민대회준비회를 조직하고 한민당을 창당하는 등 독립국가의 방향을 정립하고 미군정의 고문회의 의장으로 활동하였으며 고하의 피살로 한민당의 당수가 된 후에는 신탁통치반대와 정부수립을 위한 정치활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수립 후에는 야당의 당수가 되어 한민당을 민주국민당으로 발전시키면서 이승만의 독재정치를 견제하는데 지도력을 발휘하였으며 부통령 취임 후에는 정부에 들어가 민주주의와 국리민복을 위해 헌신하였으나 점차 이승만의 독재가 노골화되자 부통령직을 사임하고 이어 범민주세력을 모아 반독재호헌투쟁에 나섰다.
'평전 인촌 김성수'(1991. 동아일보사)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