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회 20세기와 21세기의 분수령에 서서
나는 오늘 1999년의 역사적 분수령에 서서,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미숙하나마 일본의 현 상황과 금후의 아태 지역 문제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의 활발한 질문을 부탁드리며 아울러 나에게 잘못된 생각이 있을 때는 지적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우선 일본의 현상황부터 말씀드릴까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20세기를 총괄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총리 시절 나는 제1차 대전 이후의 정치를 총결산하는 작업을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 하시모토와 오부치 내각은 제2차대전 후의 정치를 총결산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시모토 수상과 오부치 수상 둘 다 말하는 내용은 세 번째의 개국 문제, 즉 첫 번째의 명치유신과 두 번째의 맥아더 원수에 의한 새로운 일본의 전개에 이은 21세기를 향한 개국 문제인데, 과연 세 번째 개국이 가능한 것인지, 이를 가능하게 하려면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생각해 볼 시점에 와 있다고 봅니다. 내가 행한 전후 정치의 총결산이라는 것은 세가지 측면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안보 정책의 대전환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이어 온 요시다류의 정체에 대한 시정입니다. 요시다류의 정치는 사토 수상과 그리고 후쿠다 수상으로 계승된 것으로, 바꾸어 말하면 일국 평화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나는 안보 면에서요시다류 정치로부터 벗어나야 할 단계에 와 있다고 언명한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이 어디서부터 왔는가 하면, 예를 들어 1983년의 윌리엄백즈 서미트에서 러시아의 SS 20의 배치에 대하여 자유 세계가 저항하려한 것에 의의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는 계획대로 그 해 12월까지 미사일을 배치하였는데 러시아가 미사일 배치를 단행할지 어쩔지가 1983년 윌리엄백 서미트의 과제였던 것입니다. 서미트에서는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 사이에 대립이 있었습니다. 프랑스 대통령은 프랑스가 독립된 프랑스군을 유지하고 있으므로 NATO 지휘를 받지 않겠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성명을 발표할 때도 어려움이 많아 좀처럼 성명 내용이 작성되지 않았습니다. 그전 일본 총리였다면 이러한 경우 조용히 있었겠지만 나는 스스로 발언을 신청하여 미테랑 대통령에게 강력히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소위 평화헌법을 유지하고 있다. 바야흐로 안보 문제는 세계가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불가피하다. 유럽 진영 모두 힘을 합쳐 NATO가 러시아와 대결할 경우 일본도 그냥 있지 않겠다. 군사 지원은 헌법 때문에 어렵다 하더라고 정치적 지원은 가능 할 것이다. 지금 말한 것을 가능한 한 협력하겠다",라고. 이렇게 말하자 일본이 언제부터 NATO에 편입되었느냐고 국내에서 호되게 비난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런 비판을 이미 각오하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이 세계의 평화를 확립하고, 소련을 위축시켜 소련의 공산주의를 붕괴시키기 위한 기회가 될 가능성도 있다고도 말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미테랑 대통령을 설득했습니다. 평화 헌법을 가진(일본 수상인) 제가 그런 말을 했으므로 미테랑 대통령은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그 기회를 레이건 대통령이 잘 잡아서 윌리엄 백 서미트는 성공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이른바 요시다 수상식 정치인 일국 평화주의에서 탈피했다라는 것이 나는 안보관의 중요 요체입니다. 그리고 일본의 방위비는 GDP1%이내로 억제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역대 내각이 지켜온 1% 한도를 깼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국가 방위가 그러한 수치에 얽매인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상황의 변화에 따라 그 숫자는 변할 수 있다. 그러나 가능한 한 방위비를 최소한으로 억제해 둘 필요는 있다. 다만 숫자로 억제한다는 것은 나의 방위정책상으로는 적절하지 않다.' 나는 이와 같은 생각에서 방위비 1%의 한도를 깼던 것이다.
총결산의 두 번째는 행정과 재정 개혁의 단행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일본은 전후 대단히 급성장을 하여 관청이나 기업 모두 규모가 방대해졌습니다. 이러한 관청과 기업 조직을 자르거나 또는 민영화를 시키고, 또는 규제를 완화하고, 또 국경의 창을 열어 관세를 낮추는 등으로 외국 부문을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나는 또 그와 같은 개방 정책을 과감히 실행함과 동시에 민영화해서 오늘날의 JR로 또는 NTT로 바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