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촌기념강좌

제17회 세계 정세와 한반도의 미래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대통령 한반도는 우리 지구상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중요한 동북아 지역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물론, 한반도 정세는 상당 부분이 국제 정치 및 경제 상황에 의해 결정되지만, 한편으로는 한번도 정세 역시 국제 관계의 전체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냉전은 이 지역에 힘겨운 유산을 남겨놓았습니다. 동북아는 재래식 무기와 미사일.핵무기로 무장한 막강한 육해공군을 앞세운 소련과 미국의 군사.정치적 대립의 주무대였습니다.

이 지역은 중.소 관계의 해묵은 마찰, 타이완 문제, 역내 국가간 영토 분쟁으로 정세가 불안정했던 곳입니다. 그러나 가장 심각하고 가장 위험한 문제는 한민족이 두 나라로 나뉜 한반도 분단입니다. 동북아 지역의 긴장은 오랜 동안 완화되지 않고, 오히려 고조되었으며, 80년대 후반 와서야 냉전구조 해체의 일환으로 펼쳐진 각계각층의 노력으로 급격히 호전되었습니다. 새롭게 시작된 미.소간 군사적 대립완화, 중.소 관계 정상화는 이 지역에 분위기를 일대 쇄신시켜 놓았습니다.

소련의 對한반도 정책을 비롯한 對동북아 정책은 근본적으로 수정되었습니다. 이 새로운 정책은 타국의 국익을 고려하고 또한 자국과 타국의 상호이익의 조합을 고려하여, 실리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당시를 떠올리면, 저는 이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북한측의 반대뿐 아니라 소련 정치 지도자들의 이념적인 고집도 원인이었습니다. 이 문제는 당시 정치국 간부회의에서 수 차례 제기된 바 있습니다.

1988년 9월, 저는 러시아의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연설하면서 "소련국경지역, 중국, 일본, 남북한 주변 지역에서의 군사적 대립 완화 문제를 다자간 차원에서 논의하자"라고 제안했습니다. 한반도 정세를 전반적으로 개선한다는 의미에서 한국과의 경제 관계를 맺을 가능성을 열어 놓은 저의 발표에 한국측도 동의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이 진전되었습니다.

북한측으로부터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88서울 올림픽에 참여하였습니다. 우리 양 국가간에 교역이 시작되고, 해상로와 항공로가 열리고, 전화가 연결되었으며, 1990년에는 서울에서는 소련 공식 상공회가, 그리고 모스크바에서는 한국의 KOTRA가 문을 열게 되었습니다. 재소 한인들이 한국의 고향을 방문하여 일가 친척들을 만나는 등 인도주의적 차원의 교류도 시작되었습니다. 1990년 초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노태우 대통령과 처음 만나서 양국간 국교를 정상화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리고 9월30일에는 한.소 수교에 대한 문서에 서명을 하였습니다.

소련과 한국간의 수교는 상징적인 사건이었고, 동시에 양국 관계 발전뿐 아니라 한반도와 동북아의 정세 개선을 위한 새로운 분기점이었습니다. 이 후로 한.중 수교가 이루어졌고, 남북한이 국제연합에 가입하였습니다. 미국과 일본이 북한과 접촉을 시작하였고, 남북한은 한반도 주변4강에 의해 확실히 인정받는 분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한반도 비핵화를 포함하여 소련과 미국간 군사 대립의 완화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이 생겼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변화가 남북 대화를 실현하는데 촉진제가 되었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동북아 지역과 한반도에서 러시아의 전략적 노선은 80년대 말과 90년대 초의 정책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러시아는 양자관계에서나 다자관계에서나 동북아의 모든 국가들과 확고하고 평화적인 선린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정치,경제,과학기술 분야에서의 상호호혜적인 긴밀한 협력과 인적 교류를 추진하고자 도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책에서 중요한 요소는 마지막 남은 생전의 잔재 해소, 즉 한반도 분단을 종식하고 한민족 통일을 위한 노력을 지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은 한민족의 열망과 2차 대전 이후 남북 분단, 그리고 한국전 이후 분단 상황의 고착화에 대한 우리의 책임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또한 현재 우리 나라의 지정학적, 지경학적 이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러시아는 동방의 이웃나라인 남북한이 하나로 통일되어 동북아 지역의 안정과 번영의 요소로서 국제 무대에서 확고하고 자주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강한 민주주의 국가가 되는데 관심을 지니고 있습니다. 물론, 남북통일은 무엇보다도 한민족 당사자의 일입니다. 통일은 점진적인 관계 접근과 정치적 대화, 경제.문화적 동질성 회복, 인적 교류 활성화를 통한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방법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남북간의 차이는 상당히 크며, 이를 완화하고 극복하기 위해서는 장기적인 노력과 정성이 필요합니다. 러시아는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과 작년 6.15 남북정상회담을 가능케 했던 평화애호적 통일 노력을 높이 평가합니다. 김대통령의 이러한 정책은 세계적으로 인정받았으며, 여기에 합리적인 대안은 없습니다. 햇볕정책만이 한반도 통일의 길로 인도할 남북관계 접근의 실질적인 성과를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것들이 역내 강대국들의 정책 등 국제적 요소에 의해 좌우됩니다. 지난 과거의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냉전 체제의 대립 하에서 남북한은 통일방안에 대한 신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이렇다할 만한 실질적인 결과를 얻어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남북 관계의 긴장은 고조되었고 차이는 심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지역 정세가 개선되자마자 남북 회담을 위한 구체적인 행보가 가능해졌습니다.

러시아는 남북 대화와 관계 접근을 위한 우호적인 국제적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적잖은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동아시아 정책 중에서 중요한 우선순위를 차지합니다. 한.소 수교시에 우리 정치가 이념적 도그마와 선입견에서 벗어나는데 획기적인 조치들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90년대에 또다시 대외정책의 이념화가 부활되어 우리의 노력이 퇴보되던 시기도 있었습니다(러시아의 친남한 정책을 의미-역주). 그리하여 러.북 관계가 급속히 악화되었는데, 이는 완곡히 말해서 어느 누구에도 득이 되지 못했습니다.

푸틴 정부가 추진한 균형적인 대 한반도 정책에 의해 이러한 비정상적인 상태는 해소되었습니다. 저는 바로 이 균형정책이야말로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는데, 즉 남북간의 점진적인 관계 접근을 통한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통일을 달성하는데 건설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이 점에 대해 러시아가 북한 카드를 이용하려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것은 큰 오산입니다. 우리 나라는 한반도 정세 안정을 위해서 남북한과의 관계를 동시에 정상화하고 균형을 이루려는 입장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남북관계 접근에 새로운 장을 열어 줄 북.미 관계 정상화 조치를 환영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이 과정에서 남북대화에 문제를 제기하고, 이 과정을 더디게 한 미국의 신행정부의 태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러시아는 다른 어떤 나라 못지 않게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통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러시아의 국익 또한 전혀 여기에 대치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남북한이 통일될 경우에 어떤 지랫대를 잃어버릴 것이라는 염려는 하지 않습니다. 물론, 통일한국이 국제관계 체제 내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통일한국이 직접 결정할 것이지만, 우리는 만일 러시아가 균형정책을 추진한다면, 러시아는 우호적인 국가를 이웃으로 두게 될 것입니다. 러시아는 자국의 정치 군사적 계획을 실현하기 위하여 어떤 적국이나 불량 국가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이웃에 강력한 경제력을 갖춘 인구 7천만의 새로운 거대한 국가가 등장할 것이라는 전망에 놀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 이웃과의 확고한 상호보완적인 협력관계를 기대하며, 이는 러시아의 극동.시베리아 지역은 물론 우리 나라 전체로서도 매우 중대한 것입니다.

러시아의 남북한 균형정책은 남북대화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 발생한 전대미문의 무자비한 테러사건 이후에 더욱 큰 의미를 지닙니다. 미 테러 사건은 인류 전체에 대한 도전이며, 이로 인해 국제정치의 기본 축은 테러 근절과 테러 발생 원인의 제거로 옮겨갔습니다.

이제 남은 중요한 과제는 테러리즘을 이념.정치.금융 면에서 고립시키는 것이며, 대대적인 반테러 전선을 구축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북한 지도부가 즉시 미국 테러 사태의 만행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한 것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바로 이 점이 북한 지도부의 입장 변화와 국제사회와의 관계 발전, 즉 남북대화에 대한 관심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강대국이나 국제사회 전체를 위해 북한을 다양한 국제 무대로 끌어들이는 것은 남북대화를 위한 더 좋은 배경을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러시아가 남북한 균형정책을 취함으로써 남북관계 개선, 특히 제3자 경협에 긍정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대륙간 새로운 철도 연결사업과 같은 대규모 프로젝트, 러시아의 풍부한 천연자원 및 과학적 잠재력과 한국의 자본과 기술, 북한의 노동력의 결합, 북한 산업의 현대화, 러시아 극동 지역개발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모델을 개발하는데 국제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러시아의 건설적인 역할보다 더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는 (한국,북한 그리고 4대 강국인 미국, 중국,러시아, 일본이 참여하는) 6자 회담을 추진하고 그 이후에 보다 폭넓은 문제를 다룰 수 있는 동북아 대화 채널을 만드는 방안이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방안을 실현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노정되어 있지만, 우리 두 나라가 단계적으로 협력과 공조를 증진시켜나간다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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